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떼아리 May 12. 2023

쓰레기는 티가 나는 법

#눈치챘을 결말




나는 굳이 말하자면, 상대의 강압에 숙이는 성격이 아니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반항하게 된다.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는데, 가족들은 내가 독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하하.


차라리 상대가 너무 안쓰럽거나 기대오면 그런 거에는 좀 약해지기도 하고, 어지간하면 받아주는 편인데.

아무튼, 그 놈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때리는 대로 맞아주고, 제 말대로 따라줄 사람이 아니라서.





이전까지 그런 행동으로 여자들을 제멋대로 휘둘렀다는 걸 자랑처럼 말하는 그 놈이 무척 혐오스러웠지만, 그 과거의 여자들을 동정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비록 힘으로 이길 순 없었지만, 나는 있는 힘껏 저항했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그 놈이 목을 조르면, 나 역시 목을 졸라버렸고, 폭언은 무시해줬다.

네까짓 놈의 말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덕분에 폭력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밟아누를 수 없다고 판단하더니 다시 회유가 이어졌다.

폭력과 사과의 반복.

우습지. 더 만날 생각도 없었는데. 

애초에 첫 폭력에서 내게는 이미 끝난 관계였다.

그 놈 혼자 그걸 몰랐을 뿐이지.





나는 증거를 확보했고, 그 눈 앞에 증거를 흔들어줬다.

변호사도 알아봐뒀다.

2년을 만나면서 한다고 한 것을 안 한 적은 없는 나를 잘 아는 그 놈은 결국 두 손 들고 물러났다.

거기에 물리적 거리까지 더했다. 


모든 게 잘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그 정도는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 정도'라는 전제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 건 금방이었지만.





그 놈과 헤어질 무렵부터 몸이 안 좋았다.

폭력 때문은 아니었고, 내부에서부터.


술자리로 가득했던 대학 시절과 끊이지 않던 사건 사고와 심지어 교통 사고까지 있었던 시기.

안 그래도 문제가 많던 몸에 정말 큰 이상이 생겨버렸다.


응급으로 실려갔고, 수술을 받았다.

마취가 깼는데 정신이 오락가락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열이 너무 높아 그랬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정말 정신이 깜빡깜빡 거렸다.

정신을 차렸다가도 금방 툭 놔지고, 다시 정신을 차리면 시간은 이미 많이 흘러 있는 상황의 반복.


우습게도 그 순간, 가족도 친구도 아닌 첫사랑을 떠올렸다. 





그 아픈 와중, 미친듯이 보고싶었던 유일한 사람이 잠시 스쳐지나간 남자애라니.

그때까지도 첫사랑이 첫사랑인지 몰랐던 나는, 그런 고민을 했었다.


이 정도 아파서 전화 걸면, 핑계로 괜찮지 않나?

그런데 속상하게도 휴대폰이 내 손에 없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열이 어느 정도 내린 상태였다.

항생제를 매일 쏟아넣고 있긴 했지만, 살만 해지니 핑계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또 나는 그 감정을 애써 삼켰다.

당분간 몸이나 추스르자고 생각하면서.

또 하나의 이별이 하필 그때 닥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입원한 상태로 있다가 새벽에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다른 식구들은 그 전날 할머니를 뵙고 왔는데 나는 입원해 있느라 못 갔었다.

그게 마지막 모습일 줄 알았다면, 인사하러 어떻게든 갔을 텐데.


처음 당해보는 조부모의 상이었다.


급하게 퇴원 수속을 밟는데, 혈압이 너무 낮아서 의사 선생님과 고군분투했다.

그래도 어떻게 퇴원을 하긴 했는데, 장례식이라는 게 참, 쉽지가 않더라.





항생제를 가득 안고, 상복을 입었다.


시간마다 챙겨주지 않으면 다시 열이 올라 버리는데, 아버지 쪽 손님이 워낙 많아서 정신 차릴 틈이 없었다.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가 되면 동생이 약을 챙겨줬고, 3일은 마치 밤 없는 며칠처럼 후딱 흘러가버렸다.


발인하는 날까지,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버텼다.


그리고 발인 날, 눈이 펑펑 쏟아졌다.

그 눈을 보면서 나는 또 첫사랑, 그 남자애를 떠올렸다.

첫눈, 같이 보려고 정말 노력했는데 결국 만날 수 없는 날 내렸었지.

그 이후로도 눈만큼은 같이 본 일이 없었는데. 





몸이 약해진 상태에서 할머니와의 이별까지 겪으니 내 안에서 뭔가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폭력 성향이 짙었던 그 놈의 영향으로 몇 가지 트라우마도 생겨버렸고.


그때의 나는 이걸 고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고칠 의지조차 없었다. 


꽤 오래 나를 보살피고, 고치고, 지켜준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전 06화 쓰레기는 티가 나는 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