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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아리 May 19. 2023

너는 나의 자랑이야

#독한 애와 독한 애



친해진 남자 동기와 어울려 다니면서 즐거웠지만, 때로 불안한 마음이었다. 고백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만큼이나 선이 확실한 사람이 내게 하는 정도 이상의 배려와 표현은 어쩌면 신호였겠지만, 내게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살면서 가장 확고하게 지킨 규칙 하나가 친구와 사귀지 않는 것이었다. 연애 감정 자체를 우선순위 맨 마지막에 두었던 나는, 고작 그런 것으로 우정을 잃어야 한다는 게 싫었다. 하지만 그 동기는 '친구'까진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애매한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고백이 예상하지 못했던 타이밍에 튀어나왔다. 



"만나볼래, 나?"



돌리는 법 없이 그대로 직구. 


잠시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돌아다녔지만, 대답은 금방 나왔다.



"아니."



나는 거절을 잘하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거절이 쉬운 것은 아니다. 다만, 해야할 일이라고 판단하면 힘들어도 해야한다고 생각할 뿐. 


여지를 남겨 상대를 괴롭힐 필요도 없고, 괜히 돌려 말하며 스스로 함정에 빠질 필요도 없으니까.


거절 뒤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거절을 하면서도 나는 그 사람이 상처받았을까? 내가 혹여 이성적인 여지를 나도 모르게 준 것은 아닐까? 여러 생각에 휘말린 채였다. 



"거절당할 줄은 알았는데, 칼 같네."



"음, 미안."



할말이 그것뿐이라 어색한 기분이었다. 



"거절해야 할 걸 거절할 줄 아는 건 장점이지."



거절당한 사람치고 꽤 담담담해 보여서 나는 안도했다. 하지만 이전 같을 수 없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라도 감정이 있다면, 그걸 서로 인지했다면, 그 어떤 노력으로도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꽤 속이 쓰렸다. 왜 우정은 늘 어려울까? 감정의 크기와 깊이는 왜 늘 달라야만 할까?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같은 감정으로 대응할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싫었다. 


좋은 친구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정말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 즐거웠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 정도의 거리를 더 유지하는 것은 옳지 않겠지. 나는 그 사람과 조금 더 먼 거리에 있기로 했다.






이후 강의에서 마주쳐도 데면데면한 며칠이 흘렀다. 상대는 반갑게 인사했지만, 나는 눈 인사로 받아주는 것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혹여 그마저도 여지가 될까봐. 


아는 여동생의 생일 날. 그 사람이 커피 한 잔 하자는 말에 약속이 있다며 고개를 젓고, 여동생을 만나러 갔다. 아주 친한 사이까지는 아니기 때문에 그 여동생과 둘이 생일을 보낸다는 게 부담 같았지만, 그래도 저 쪽보다는 낫겠지 싶었다.


밥 대신 술을 마시는데 그 나이에 으레 여자 둘이 술집에 가면 그렇듯, 합석 제안이 있었다. 그럴 기분이 아니어서 몇 번 거절했지만, 생일인 여동생이 마음에 들어하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에 거기까지 거절하지는 못했다.


적당히 분위기를 봐서 빠지려고 일부러 자리에 집중하지 않았다. 여동생은 마음에 들어 보이는 남자와 분위기가 괜찮아 보였고, 그 이후의 일은 내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친밀한 사이었다면 모를까.


게다가 성인이 자기 의사를 가지고 행동하는데 내가 뭐라고 거기에 끼어들까?


술 게임에 술을 꽤 마시고, 바깥 바람 좀 쏘이겠다 말한 뒤 2차로 간 룸 술집을 나왔다. 멍하니 있다 보니 여동생과 꽁냥거리는 남자 말고, 다른 놈이 따라나오더라. 하긴, 이 사람도 저 안의 분위기에 혼자 있긴 힘들었겠지.



"도망갈까요?"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물어온다. 


도망을 가려면 가면 되는 건데, 그걸 나한테 굳이 묻네.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가요."



"나 혼자?"



"구실 필요하면 같이 빠져주고요. 비 맞기 싫어서."



"우산 있는데."



그러니까, 그 우산. 난 왜 매번 그걸 안 챙겨서. 



"나는 택시 타면 될 것 같은데요."



상대는 존대와 반말을 섞어 하다가 이미 반말로 넘어왔지만, 나는 왠지 반말을 하기가 싫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사람이지만, 초면이고, 다시 볼 사이도 아니니까. 



"형이 아까부터 빠져달라고 하는데, 난 술이 조금 부족해서."



넌 어때? 라고 묻는 시선에 잠깐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이후 들어가서 보니 적당히 빠져도 될 분위기라 자리를 정리하고 나왔는데 비가 내렸다. 오늘 처음 본 사람과 우산을 쓰고, 근처의 포차형 호프에서 술을 한 잔 더 했다. 개방된 장소라서 편안했다.


여러 질문이 들어왔는데, 좀처럼 집중이 되지는 않았다. 빗소리와 사람들 소리와 음악 소리와 초면인 사람의 목소리가 한껏 뒤섞인 채 머릿속에 들어와 그냥 사라지는 느낌이라서. 



"만나는 사람 있어?"



"있으면 아무리 쟤 생일이어도 합석 같은 거 싫다 했겠죠?"



"하긴, 것도 그렇네. 원래 헌팅 같은 거 별로야?"



"네. 낯을 좀 가려서."



진실을 말한 건데 상대가 낮게 웃었다. 아니, 왜 웃지? 나 진짜 낯 가리는데. 말 안 하면 다들 잘 모르긴 하지만, 난 낯을 꽤 가린다. 차라리 다수가 초면이면 괜찮은데 1 대 1이라면, 그 정도는 심각해진다. 물론, 내 스스로 느끼기에 그런 거지만. 



"외향적이던데. 술 게임은 좀 꽝이었지만."



원래도 술 게임에 강한 편이 아니긴 하지만, 집중력이 떨어지다 보니 더 하긴 했다. 그래서 난감한 상황도 몇 번 있었고, 그러고 보니 상대가 몇 번 벌주를 대신 마셔주기도 했었다.



"아직 소원을 다 못 썼네."



"쓰려면 바로 썼어야죠. 끝남."



그렇게 말하면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화가 울렸다. 이 귀신 같은 타이밍에 카톡도 아니고, 무려 전화를 해준 사람이라니. 새벽인데. 누군지는 몰라도 밥 사야겠다 생각하며 봤더니 그 동기였다. 





술을 꽤 마신 것 같다고 말하더니 데리러 가냐고 물어본다. 내가 답을 망설이자 금방 상황을 알아챈다. 나중에 물어보니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말할 애가 고민하는 거라면, 그런 상황일 거라는 유추가 가능했다고.


여하튼, 그 애의 통화 센스 덕분에 나는 조금 더 수월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술김에 생각했다. 나도 참 독하다는 소리 많이 듣는데. 얘도 만만치 않네. 거절당하고, 거리까지 대놓고 두는 나한테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어쩌면 나랑은 다른 의미로 독한 것도 같고.



"친구였으면 좋았을 텐데."



혼자 중얼거리니 상상이 됐다. 둘 다 독해서 장난을 정말 많이 치겠고, 뭔가 하게 되면 승부욕에 난리가 날 터. 그리고 즐거웠을 거다. 무척.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원래 가질 수 없는 것에 더 욕망하는 법이라는. 그 사람과의 우정 역시 내게 그런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그냥 잠시 지나칠 감정이라면, 언젠가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때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독한 사람의 감정은, 원래 독한 데가 있는 법이니까. 


나 역시 우정이든 뭐든 사람에게 정을 많이 주는 성격은 아니지만, 한 번 정을 주면 그 정조차 독하게 오래 가곤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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