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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아리 May 23. 2023

너는 나의 자랑이야

#친구처럼 만나도 돼

한동안 동기 남자애와 서먹했지만(혼자 서먹하게 굴었지만) 사이는 금방 다시 좁혀졌다. 내가 그어놓은 까탈스러운 선이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켜준 덕에 다시 경계심이 흐려진 탓이었다. 가끔은 그 태도를 걱정했지만, 같은 조가 되어 과제를 하고 매일 마주치다 보니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한창 바빴고, 그 동기는 일상에 지친 나를 많이 웃게 했다. 대화 몇 마디로도 깔깔거리게 만들고, 끼니를 거르고 싶을 때 기어이 앉혀 밥을 먹이고, 노래방을 싫어하게 된 나를 다시 코인 노래방에 발 들이게 만들고, 대학교 신입생 때 잠깐 배워 까먹은 당구 사구를 다시 가르쳐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다를 오래 떨었다. 타인하고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눠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늘 목 안에 끼운 채였던 필터가 흐릿해지고, 가끔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을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 끝에 차라리 내가 그 동기를 진심으로 이성으로 좋아하게 될 수 있길 바랐다. 좋아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은 걸까? 아니면, 혼자는 도저히 이 모든 것을 견디기 어려워서 도피하고 있는걸까? 그중 하나라도 확실해진다면, 내 선택이 달라질까?


혼자 했던 모든 고민이 무색하게도 그 사람은 다시 고백했다. 나 역시 다시 거절했고, 한 번 더 서먹해졌고, 또 가까워졌을 때 세 번째 고백을 들었다.



"친구처럼 만나도 돼."




참 많이 들어본 말이지만, 저 말을 정말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면 안 된다는 것 역시 배웠다. 결국에는 감정의 크기 차이에 연연하게 될 수밖에 없고, 내가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으니까. 



"그런 소리 하는 놈들 나중에 말 바뀌는 많이 봤겠지만, 명확히 이야기하자면 좀 다르긴 해."



그리고 덧붙이는 말에 궁금해졌다. 대체 무엇이 다를지. 



"나랑 이렇게 놀아. 매일 보고, 뭐가 필요할 때 망설임 없이 전화해. 눈 마주치면 고민할 필요 없이 당연히 옆자리에 있는, 딱 그 정도."



그 말에 가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다 내가 그 사람에게 선을 두기 위해 꺼렸던 일들이었기 때문에 혼자 뜨끔했다.



"그 이후는 내가 알아서 해야지. 네가 굳이 내 속도에 맞춰야 할 필요 없어. 결국 그 이상 가지 못해도, 그건 네 탓이 아니고."



이어지는 명확한 말투에 나는 몹시 흔들렸다. 사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해결책처럼 느껴지긴 했다.


그런데 상대는? 정말 괜찮을까?



"뭐, 네가 영 날 안 좋아하면 서운하긴 하겠지만. 난 최선을 다할 거고. 결과는 내 몫도 네 몫도 아니니까."



면죄부처럼 건네진 말에 바로 거절하지 못했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거절하기에는 지나치게 달콤했다. 






남에게 기대는 행위 자체가 어색했던 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로, 혼자서는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 사람이 기꺼웠다. 생각하는 것조차 찰떡 같이 들어맞는 그 관계가 몹시 좋았다. 


내 고민은 단 며칠만에 끝났다. 그간 거절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사실, 계속 고민했지만 딱 한 순간,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행동 하나에 마음이 정해졌다.



"만나 봐, 친구처럼."



네가 노력하는 만큼 내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가만히 앉아 받고만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단지 내가 너무 느려서, 과정이 더딘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러다 마음이 맞으면, 내게는 큰 행운이겠지.


이후의 삶을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너 같은 사람은 절대 없을 것만 같으니까.


온갖 생각과 감정이 속을 시끄럽게 만들었지만, 보통 그 모든 생각에 매몰된 채 빠져나오지 못하는 나지만, 그 사람은 행동 하나 말 한마디로 나를 쉽게 꺼내줬다. 그렇게 지금까지도 그 누구보다 내게 좋은 사람이었던 남자와 만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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