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 곁에서 안전해
어떻게 보면, 나는 평온함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일단 성격부터. 그렇다 보니 주변도 시끌벅적한 편이다. 자연스럽게 여러 문제는 뒤따라오고, 유난히 크게 일렁이는 날들도 생기기 마련.
그 시절에는 힘들다는 말이 꼭 지는 것 같아서. 너무 나약한 소리 같아서 아닌 척 살았다. 주저앉아 울고 싶은 날은, 끝까지 텐션을 끌어올려 놀다 집에 와 무너졌다. 그러면서도 무너지는 내 모습이 참 싫었다.
혼자 있을 때조차 스스로 전혀 다독이지 않던 미련함이 이제 와 돌아보면, 참 어렸다. 몸만 다 자란 채 지금도 내면은 성장하고 있고, 아직 멀었지만, 그때는 더 미성숙한 인간이었다.
스스로 만든 원 안에 사람을 들이지 않았던 건, 그냥, 대충 쿨한 이미지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적어도 강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건 확실하다.
아마 쭉 비슷하게 살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 남자 동기가 변수였다.
나를 변하게 했거나 내 삶에 큰 영향력을 끼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처음에는 당연히 그 모든 변화가 싫었다. 불안했고, 피하고 싶었고, 고개를 젓고 싶었다.
남자친구라는 권리가 필요하다 했던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당당하게 손을 내미는 그 남자 동기를 보며 많이 떨었다. 즐거운 종류의 떨림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두려웠다. 시간이 지난 후에는 손을 내미는 순간마다 그 사람 역시 떨었다는 걸 알게 됐지만, 당시 내 눈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 당당함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다들 그냥, 기대며 사나? 기대어 쉰다고 나약하단 뜻은 아닌건가?
내가 미련한 고민을 반복할 때 그 남자 동기는 내가 편안히 자기에게 기댈 수 있도록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했다. 일상의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된 부탁과 투정에 그토록 뿌듯해하던 표정을 본 후부터는 나도 고민을 끝냈다.
잘못된 게 아니야. 약해지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믿음일 수도 있지 않을까?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완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기댈 수 없었던 거잖아. 약점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믿지 못한다는 말이니까. 그러니까 이건 믿음의 과정인 셈.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신뢰 관계를 배우는 과정인 거야.
생각을 바꾸니 모든 게 조금씩 수월해졌다.
겨우 잠들었다가도 금방 느닷없이 깬 채 밤을 지새던 내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에도 요동치던 마음이 진정됐고, 근본적으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늘었다. 웃는 날이 많아졌다. 이를 악물고 삼키던 감정과 생각이 조금씩 밖으로 나왔다.
가끔 내가 꺼내지 못하는 날에는 귀신 같이 알아채주니 마음이 따뜻했다.
오랜 태풍이 지나가고 드디어 잔잔한 수면 위에 뜬 기분.
흐린 하늘을 기어이 비집고 나와 비추는 햇살처럼, 포근한 나날이었다.
그 사람은 2년 넘게 나의 보호자이기도 했다.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내가 가는 곳 어디든 따라와 사람들에 치이지 않게 하는 것부터 아플 때 한달음에 달려와 병원에 데리고 가고, 죽을 먹이고, 약을 먹이고, 쉬게 하는 일까지.
당시 몸 상태가 아직 말이 아니었던 때라 자주 아팠고, 그 모든 순간이 번거로웠을 수 있는데. 싫은 소리 한 번 없이. 먼저 부탁하지 않아도. 마치 자기의 일인 것처럼 기꺼이 날 보살펴줬다.
살아가면서 갚을 날이 있을까? 누구에게라도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몇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어려운 일일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랬기 때문일 거다. 모든 이의 애정을 애초부터 믿지 않던 내가 그 사람의 애정만은 단단히 믿고 있었던 이유가.
타인을 그렇게까지 믿어본 건 그 사람이 처음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 정도의 믿음을 가지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심지어 취향이 잘 맞아 떨어진 덕에 결혼 생각이 없었는데도 그 사람이 결혼을 이야기하면 맞창구 싶은 순간이 생기곤 했다. 정말 잘 살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그런데도 끝내 고개를 저은 건, 그게 오롯이 나에게만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염치는 있었으니까.
나는 내 행복을 그 누구의 행복보다 간절히 바라지만, 그 소망 위에 다른 이의 행복도 빌 수 있다면. 주저하지 앉고, 첫사랑과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다. 그때부터 지금껏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퍼붓는 애정에 기대 살았지만, 그 이상으로 그 사람이 원없이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길다고 하기도 짧다고 하기도 애매한 2년 동안, 나 역시 그 사람을 많이 좋아했다. 어느 선을 넘지 못하는 애정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표현했다. 그리고 그 사람 옆에서 나는, 그 시절만큼은 정말로 안전했다. 생애 다시 없을 평화로움을 원없이 누릴 수 있었다.
여전히 떠올리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사람.
아픔 없이 그저 행복하기만 한 추억으로 남은 유일한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