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몰랐던 나를 아는 유일한 사람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늘 생각했다. 스스로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하는데 타인을 무슨 수로. 나는 그 사람이 아닌데.
사람을 분석하고,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건 그저 파악에 그칠 뿐이다. 누구라도 관찰하면 알 수 있는 그런 부분.
깊은 부분까지 누굴 들일 생각도, 누군가의 깊은 부분에 발을 들일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적당히 파악해서 적당히 대하는 게 편했다. 타인이 나에 대해 많이 아는 것도, 내가 타인에 대해 많이 아는 것도 결국 리스크만 높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남자 동기는, 그런 두려움 따윈 없는 것 같았다.
혹은 있었는데, 이겨냈거나.
그 사람의 관찰은 신기했다. 조용하지만, 정확했다. 빠른데도 세밀했다.
내가 무의식 중에 짓는 표정, 제스처, 말투, 목소리 그리고 곱씹는 것까지.
그 사람의 관찰을 피해 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나처럼, 적당히 편안한 관계를 위한 파악이었다면 그리 많은 걸 들키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건 파악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종류였다. 어쩌면, 가족조차 그 사람만큼 나를 깊이 있게 파고든 적 없을지 모른다.
나중에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웅얼거려도 내 말을 알아듣는 유일한 사람이 됐을 정도였는데, 이게 참 유용하긴 했다. 타인과 함께일 때 타인이 듣지 않길 바라는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정말 요긴하게 쓰이긴 했으니까.
제법 어른스러운 편이라고 스스로 정의하며 살았던 시절인데, 나보다 어린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 앞에서 나는 아이 같았다. 뚜렷한 키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의 30cm 차이의 키. 나를 내려다보면서도 내가 목이 아플까 자기 허리를 한껏 숙여주던.
키 차이가 많이 나는 게 늘 불만이었던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내려다보면 괜히 입술을 비죽거렸다.
"뭘 봐?"
한껏 퉁명스러운 어조에도 새침데기라고 말하며 크게 웃던 사람. 진짜 동생이라도 돌보는 줄 아는지 머리를 마구 헝클어 내가 펄쩍 뛰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자기 품에 안아주던 그 온기.
그 사람과 헤어진 이후에도 내가 삶을 제법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건 전부 그 온기 덕이었다.
망가져 깜빡거리던 전구를 갈아 끼운 전등처럼.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시들어가다 쨍하게 비추는 햇살에 선명히 초록빛을 머금은 풀잎처럼. 나는 확연히 나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남자 사람이라는 이유로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거나 손만 뻗어도 긴장도가 확 올라갔었다. 트라우마 때문이었어도, 명백한 거부 반응에 상처받았을 법 한데.
아주 천천히, 내가 안전을 인식할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속도마저 배려 그 자체였다.
"하고 싶은 걸 다 삼키면서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리고 가벼운 듯 건네진 그 말에 나는 인정해야 했다. 이 사람은, 어느 부분에서는,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안다고.
스스로 이게 내가 원하는 길이라고 속이고 있었던, 혹은 속고 있었던 내게 그 사람이 해준 말은,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어준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나는 제법 이기적인 사람이고, 나를 가장 우선하는 사람이지만, 그 시절에는 부모님이 원하는 것에 어느 정도는 타협하고자 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님조차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았을 때, 그래서 스스로도 그걸 외면하고 있는데. 그 사람만은, 가라고 해줬다.
원하는 길을 가라고. 할 수 있다고. 마치 내가 이뤄낼 수 있다고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당연히 될 거라고 믿어줬다.
그때 그 사람이 그렇게 전폭적인 지지와 믿음으로 밀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과연 지금 뭘 하고 있었을까?
비록 정말 나쁜 사람도 많이 만났지만. 그중 몇은 내게 영영 지워지지는 않을 상처도 남겼지만. 나는 내가 인복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훨씬 많았으니까.
나를 죽어가게 만들던 사람보다 살아갈 힘을 준 사람들이 훨씬 많았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남자 동기와 마주쳤으니까.
앞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도, 어떤 일을 겪어도, 마찬가지. 나는 죽을 때까지 행운아다.
2년을 넘게 만났는데도 결국 원하는 만큼 마음이 자라지 않아 내가 먼저 그 사람의 손을 놓았는데. 그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도 내 편이 되어줬으니까.
"지난 2년 동안, 네가 나의 자랑이었어."
그런 말을, 감히 어떻게 잊겠어?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떻게 포기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겠어?
나는 그 사람의 자랑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그늘을 나와서도 씩씩하게 내 길을 갈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