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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아리 Jun 09. 2023

나는 아직도 도망치는 중인가 봐

#낯설고, 낯익은


다섯 살 연하와 헤어진 이후 나는 모처럼 내가 만났던 사람들을, 혹은 그 기억을 제대로 돌아봤다. 많이는 만났는데,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실속이 없는 느낌.


누굴 깊이 아는 걸 꺼려하는 내 몹쓸 방어적 성향 때문이었지만, 참 얕게만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귄다는 것 자체가 그 선 안에 들어올 권리를 준다는 뜻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다가오면 물러났다. 


애착조차 내게는 두려움이라서. 특정 대상을 아낀다는 자체가 모자란 내겐 어려운 일이라서. 


그렇게 돌아보니 연애를 '당분간'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하지 않겠다 결심한 게 더욱 확고해졌다. 연애 중이 아닐 때가 드물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꽤 어색했지만, 일도 다른 것도 주말 없이 바쁘다 보니 금방 적응했다.


그리고 내게만 의미 있는 타이밍이었겠지만, 어쨌든 그때 다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첫사랑에게서. 



"하이! 뭐 해?"



지나치게 해맑아 보이는 인사에 카카오톡이라서 안도했다. 통화였다면,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척을 하기가 더 어려웠을 테니까. 애초에 전화라도 온다면, 심장이 제 기능을 못해버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용건은, 밥이나 한 끼 먹자는 거였다. 


오래 못 본 친구 사이인 것처럼, 소소하게 오간 대화에 나 역시 조금은 안도한 채였다. 



"네 방, 그 화장대 자리에 둔 건가?"



피아노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그 말에 심장이 덜컥거렸다. 마치 고장 난 것처럼, 그 한마디에 기억이 쏟아졌다. 꽁꽁 잠그고 살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내 안에서 버릴 수 없어서 숨겨두려고 아등바등했던 건데.


아무렇지 않게,



"아, 거기 이제 내 방 아니야."



답했지만, 속이 울렁거렸다. 


무심하다는 이유로 서운하단 말도 많이 듣는 편인데, 왜 이 남자애만은 언제나 예외일까?


하긴, 내 모든 규칙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 이 남자애 외에는 그 누구도 내가 정한 규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 자신조차.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그 남자애는 내게 유일한 존재이긴 하다. 





바로 다음날 만나기로 하고, 새벽까지 카카오톡으로 잡담을 나눴다. 별 것 아닌, 정말 누구와도 할 수 있을 법하지만, 사이사이 들어가 있는 그 남자애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대화. 


한창 바빴을 때라 꽤 무리하고 있는 상태였고, 새벽이었고, 마치 조금 생생한 꿈인 것 같았다.


새벽에 겨우 눈을 좀 붙이고 일어나 한동안 멍했다.


휴대폰을 열어 본 후에야 꿈이 아니었구나 생각하며 나갈 준비를 했다. 


초가을, 선선한 공기에 약간의 습한 느낌이 있었고, 우산 없이 나왔는데 빗방울이 떨어져서 다시 우산을 가지러 갔다가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약속 장소를 잡을 때 우리 동네로 오냐는 말에 나는 그 남자애가 사는 곳과 내가 사는 곳의 중간에 위치한 곳을 짚었다. 


아직도 내가 사는 동네를 걷다 보면, 같이 걷던 기억이 나는데. 거기에 굳이 또 하나의 기억을 덧씌우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중간 지점인 곳도 제법 자주 가는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매번 지나쳐 다니는 곳은 아니니까. 





심장이 덜컥거리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너무 담담해서 더 이상한 상태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남자애를 발견했다. 마스크를 써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키가 유독 큰 애라서 더 그럴 수도 있지만.


베이지 색 계열로 맞춰 예쁘게 입고 나온 그 남자애를 보니 웃음이 좀 났다. 그러고 보니 예쁘게 입는 걸 정말 좋아했었지. 



"가자."



굳이 인사하지 않고, 바로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란히 걷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공백이 긴 사이. 그 공백이 기껍기도 했고, 그 공백에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카페에 도착해서 주문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더니 여전하다는 투로 말한다. 그런데 그 남자애도 같은 걸로 마시겠다는 말에는 내가 응? 하며 반응해 버렸다.



"너, 커피 못 마시지 않았나?"



옛날 기억인데, 지나치게 선명하다.


커피 맛도 모르겠고, 왜 마시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스무디나 에이드를 마신다고 했던 거. 신 걸 좋아해서 레몬 에이드를 즐긴다던 10년 그 남자애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그땐 커피도 안 마셨었어?"



"응, 에이드 마셨었는데. 레몬 에이드."



"와, 진짜, 예전이긴 하구나. 아니, 그냥 애였네."



그 남자애조차 가물가물한 기억이 내게 선명하다는 게. 나 역시 내가 언제부터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셨는지 모르겠는데 그 애 기억에는 내가 그것만 마시던 게 선명하다는 게. 어쩌면 서로 잊었어야 했고, 어쩌면 크게 의미 없는 기억력일지 모르지만.


참, 이상한 관계지. 


겹치는 지점 하나 없는, 오로지 우연으로 만난 사이. 짧은 연애 기간. 그런데도 10년 동안 몇 해에 한 번씩은 만나 서로의 과거를 기억한다는 게.


그 남자애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한 걸 몹시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 주변 관계는 무척 확실하게 나뉘어 있다.


부모님까지 연결된 지인, 그냥 지인, 친구, 친한 친구, 제일 친한 친구. 


명확하게 나눠지는 관계도에 그 남자애만 붕 떠 있어서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래서 어쩐 일로 연락했어?"



감상에 잠긴 마음과는 달리 용건을 묻는 내 표면이 조금 우습긴 했지만, 사실, 걱정도 섞여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해서. 그 물음에 조금 웃더니 커피를 빨대로 쓱 휘젓는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척 길게 느껴지는 몇 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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