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했어야 하는 한마디
어쩐 일이냐고 묻는 내 말에 그 남자애는 고민이 있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진로 고민이었지만, 뒤에 이어지는 이유가 제법 타당하게 느껴졌다. 주변에는 죄다 또래인데 나는 그래도 4살 위니까 조금 다른 시각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글쎄, 어떨까?
오롯이 네 편이기만 하다는 거 하나는, 좀 다를 수 있으려나?
"그냥 사회생활을 해야 할지,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걸 쫓아가야 할지 모르겠어."
어쩌면, 누구라도 할 법한 그 고민이, 내게는 다르게 다가왔다. 내가 했던 고민이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걸 해.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 천진데, 그런 게 있으면 해야지."
"그러고 싶긴 한데, 이기적인 선택인 건 아닐까 생각도 들고."
"너부터 생각해. 다른 사람 말고."
남자 동기와 사귈 때 많이 들었던 말을, 이제는 내가 하고 있네.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사실 고민한다는 자체가 그 꿈을 너무 좇고 싶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이미 아니까. 그걸 무시하고 원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면, 행복의 확률이 많이 줄어들 테니까.
그런데 나는, 네가 꼭 행복하길 바라거든. 네가 행복하면, 내가 힘이 나서. 네가 어려운 일에 처했을 거란 상상만으로도 내게 닥친 불행 이상으로 화가 나니까.
그 어떤 논리적인 설득보다 경험적인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도 있지만, 처음으로 그 남자애에게 내 진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네가 사회생활 같은 거, 굳이 안 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시작된 말에 너무 많은 것을 넣기는 버거워서, 결국 짧게 축약되고 말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아무리 지키려고 애써도 조금씩 나를 잃어가는 것 같아. 갉아먹히는 것처럼. 그러니까 선택할 수 있으면, 네가 원하는 걸 해."
그 남자애 앞에서 이만큼 솔직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 같다.
그 사실이 뿌듯하기보다는 서글펐지만.
그리고 그 말은, 비단 그 남자애에게만이 아니라 내 주변, 내가 아끼는 모든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어쩌면, 나에게도.
사회 속에 섞이려면 어쩔 수 없이, 버리게 되는 것들이 있으니까. 아등바등 애를 쓰고, 눈에 불을 켜고 막고 있어도,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것들이 있으니까.
혹여 내가 원하는 것과 달리 모든 이가 그렇게 스스로를 잃어간다고 해도, 너만은 아니길. 너는 온전히, 항상 너이길. 그러길 바라는 것조차 내 욕심이라고 해도.
커피를 마시며 몇 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방에서 실컷 논 다음 술집으로 옮겼다. 그때까지 끼니를 챙기지 않은 상태여서 안주로 닭강정을 시켰고, 술도 약간 마셨다.
빈속에 들어간 술은 시원했고, 그 술을 같이 마시는 사람은 비현실적이라 기묘했다.
룸으로 된 곳이었는데 카페에서는 일상적인 대화로 전혀 불편하지 않았지만, 갈수록, 분위기가 달라졌다.
고치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나는 주어 없이 말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주어 없이 나온 말 중에 하필,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 있었다.
"지긋지긋해서."
마치 상대가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뱉고 나서도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빠르게 날카로워졌고, 어쩌면, 그 남자애도 나도 다쳤을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다쳤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가슴으로 와서 박히던 말 몇 마디. 그때서야 내 말실수를 자각했지만, 정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걸.
내 입에서 나온 지긋지긋하다는 말이 어떻게 널 향할 수 있겠어? 지긋지긋할 만큼 가져보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내가 지긋지긋하다고 느낀 건, 나였어.
네 앞에서 여전히 22살 같은 나.
여전히 속 안의 말을 온전히 꺼내지 못하던 나.
너만 마주치면, 아무리 붙잡아도, 매 순간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나.
그런 내가 지긋지긋했다고. 어쩌면, 얼른 정정했어야 했을까?
지금까지도 정정하지 못한 그 말이, 안타깝다. 어쩌면 이미 기억에서 지웠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정하고 싶은데. 나는 여전히 너에게 절대 먼저 연락하지 못하는 겁쟁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