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여기에서
익숙한 듯 낯설고, 그러다가 급격히 얼어붙어버린 그날 이후 다시 1년 6개월 정도가 지났다. 그 이후로 다시 만난 적은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미 지나친 사람을 다시 만나 반가움을 느끼기에 그 남자애는 너무 커버렸고, 나는 여전히 용기가 없으니까.
어떻든간에 나는 아마 그 남자애를 내 인생에서 지울 수 없을 거다. 지워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 애를 지우면, 그건 더는 내가 아닐 테니까.
사실, 그냥 잘 모르겠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기도 하고, 날 위해. 한편으론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기도 하다. 역시 날 위해.
그저 내 생각일 뿐. 그 어느 쪽에도 확신은 없다. 한 번 더 보는 날이 만약에라도 오게 된다면, 그때는 내 마음도 확실해질까? 적어도 이 상태로면 영영 미제로 남으리란 것은 분명하다.
내가 준비한 건 단 하나. 내 진심뿐이다.
그조차 이토록 오래 걸렸다. 나는 이런 거에 몹시 약해서,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를 어느 선 안에 가둔 채 살아왔기 때문에. 그냥, 다 핑계고, 답도 없는 겁쟁이라서.
이유가 뭐든, 너무 늦게 나와 손님이 떠나버린 메인 요리처럼 남아버렸다.
그래도 언젠가 기회가 오면, 그때는 늦지 않으려고. 다시 외면하지 않기 위해 나는 안전 장치를 하나 만들어뒀다.
내 방, 비밀 상자에 있는 편지 한 통.
해야 했던 말과 하지 못한 말을 대부분 적어놓은 편지 한 통을.
다시 그 애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 편지가 그 남자애인 셈 치려고 쓴 것도 있지만, 다시 만난다면 그 하나로 모든 게 끝나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쓴 것도 맞다. 그게 내가 온갖 용기를 끌어모아 꺼내는 말보다 훨씬 진솔할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 편지에는 내 감정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이 글보다 훨씬 더.
거기에 전달까지 했다면 내겐 끝난 일인 셈이니까.
어쩌면 그 남자애가 그 편지를 받아 버려 주길 바랄지도 모르고. 혹은 읽어봐 주길 바랄지도 모른다.
그냥 한 번 더, 딱 한 번 더.
내가 정말 제대로 준비된 상태일 때.
갑작스러운 만남이 아니라 내 안의 감정을 전부 들여다 보고, 엉망진창 널브러져 있던 모든 이야기를 차곡차곡 정리한 후에.
이를테면, 지금 같은 때 만난다면, 적어도 후련해질 수 있지는 않을까?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내 목적은 온전한 정리였다.
감정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상황적인 맺음이 있길 바랐다.
그런데 글을 다 쓴 후에도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일이든 글을 쓴 후에는 모든 게 정리되는 기분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써냈는데.
결론이 나면, 그때는 과연 내가 직접 행동하게 될까?
아니면 체념하고 그냥 멈춰 설지도.
뭐든 혼자 알아서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겪었던 모든 일 중에 네 번호를 누르는 일이 가장 어렵다니.
그런데 오히려 이게 자연스러운 것 같다고 느끼기도 해.
나는 처음부터 네가 불편했어.
마시지 못할 우유 한 잔을 눈앞에 둔 것처럼.
내 것이 아닌 햇살 한 줌을 훔친 것처럼.
길을 잃어 잠시 스치는 바람이라고.
그러니 욕심조차 내지 말자고.
그런데도 손이 닿았던 순간, 분명히 들렸어.
견고한 마음에 너무 크게 균열이 생겨서 모르는 척도 할 수 없었어.
예정되어 있던 자연재해에도 휩쓸려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너를 만난 순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으니까.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니까.
왜 하필 그때였을까? 원망하면서도.
그때가 아니었으면 스치지조차 않았으리란 생각에.
그거 알아?
나는 그때, 모든 걸 잃어도 좋다고. 처음 생각해봤어.
아주 찰나, 순식간에 지나간 생각이었지만.
그런 생각은 그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혹은 내 주변 모든 것이 소중한 보통 사람이니까.
그 모든 걸 절대 놓을 마음 없이 살아왔고, 살아갈 거니까.
앞으로도 그런 생각 같은 거, 잘 안 하겠지.
그런데 그런 생각이 한 번 들었다는 자체만으로 두려워 도망쳤어.
그러다 너만 잃고, 모든 게 내게 여전히 남아있을 때 알았어.
내가 잃은 건 네가 아니라 나라고.
나는 그때 너와 헤어지면서 내게 있는 가능성을 하나 잃었어.
가장 따뜻한 모습으로 피어날 수도 있었을 가능성을.
그런 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가만히 있으면 내가 너무 아플 거 같아서.
그래서 몸을 혹사시키고, 내 감정을 소모품 취급하며 살았어.
어쩌면 살아가려고 발악한 결과였을까?
어떻게든 살아가고 싶었나 봐.
어쩌면, 어느날, 그곳에 네가 다시 서있을지 모르니까.
실낱같은 희망이었지만, 0.1%의 가능성이었지만,
그조차 내게는 살아갈 이유가 됐었나 봐.
이제와 너와 나의 관계를 정의하자면, 그냥 인연이 아니었다는 깔끔한 한 문장밖엔 남지 않는데.
그게 사무친다고 하면, 내가 너무 미련한 걸까?
하지만 미련하고 싶어 미련한 사람이 어딨어?
누구보다 내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데. 내가 미련하지 않기를. 이렇게 멈춰 선 채 지나가는 시간을 속절없이 버리지 않기를. 그렇게 바라면서도 고작 그 작은 용기가 없다는 게 서글퍼.
그런 생각도 들어.
스스로 무너지고, 겨우 추스르고 반복하면서 나는 대체 언제까지 혼자 널 앓아야 할까?
가끔 네가 너무 보고 싶을 때조차 스스로 주저앉히고, 막아서고, 손수 만든 벽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그저 그 순간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그 답은 너무 간단한데. 전화 한 통, 카톡 한 번,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못 하는지.
약간 소심해서 논리를 방패 삼아 사는 내가 논리에 의해 움직일 수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차마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는 나를 보는 게 나 역시 답답해.
그러다 언젠가, 또 아무렇지 않게, 네 연락이 닿는다면.
그때는 나 역시 온 힘을 다해 마무리 지어야겠지.
감정의 맺음은 약속할 수 없지만, 원래 마침표 뒤에도 여운은 남는 법이잖아?
그러니 이제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해줘. 내가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너무 늦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