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게임을 하거라,
나는 책을 읽으마

"Books Unite Us, Censorship Divides Us"

by 라떼

Books Unite Us, Censorship Divides Us

옛날 산타애나란 곳에 게임하는 아들과 책 읽는 아빠가 함께 살았는데, 아들이 게임을 게을리하자 어느 날 아빠가 아들을 불러 앉혀놓고 말했다.

"욱아, 불을 끄거라. 너는 게임을 해라, 나는 책을 읽으마."

아들은 불을 끄자 게임에 더 집중할 수 있어서 게임을 승리로 장식하고 훌륭한 게이머가 되었다. 아빠는 어두워 책을 읽을 수 없어서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산타애나에 전해오는 옛이야기)



나는 토요일 아침에 테니스를 치고 오후에는 도서관에 간다. 오후에 집에 있으면 시간을 생산적으로 쓰지 못한다. 책을 읽지도 않고 글을 쓰지도 않는다. 물론 주말은 편히 쉬라고 있는 것이지만, 나의 경우, 아무것도 안 하는 주말은 편하지 않다. 반나절 정도 책도 읽고 글도 쓰는 생산적인 시간을 가진 후에 보내는 휴식 시간이야 말로 진정 편안한 시간이 된다. 때론 주말 하루쯤은 가까운 곳에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좋아한다. 아무튼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난 뒤 갖는 편안한 느낌이 내겐 진정한 휴식이다.


반면, 욱이에게 편안한 휴식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다. 물론 전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욱이는 주말에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영화나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하고, 때론 노트북 컴퓨터로 게임을 한다. 욱이는 여행 가는 것도 그리 내켜하지 않는다. 그냥 집에서 게임을 하며 쉬는 게 그에게는 최상의 휴식인 것이다.


나는 욱이의 취향을 존중하려고 한다. 예전 같으면 누워서 핸드폰만 붙잡고 있지 말고 같이 나가자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그러면 욱이는 제발 아빠의 생각을 강요하지 말라고, 나는 아빠가 아니니 내버려 두라고 하며 반발했을 것이다. 그래서 둘 사이의 평화와 나만의 기쁨을 위해 혼자 도서관에 온다. 지금 욱이는 집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 욱이도 게임 안에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찾기를.


내가 사는 산타애나는 어바인, 가든그로브, 터스틴, 파운틴 밸리 같은 작은 도시들이 포함된 오렌지 카운티에 속해 있다. 오렌지 카운티에도 도서관이 많은 데, 우리 집과 가장 가까운 곳이 파운틴 밸리 도서관이다. 지금 이 글도 파운틴 밸리 도서관에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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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틴 밸리 도서관

파운틴 밸리 도서관은 한국의 지역 공공도서관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아기자기하면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주민들에게 다가가려 하는 것 같다. 우선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 등 여러 언어로 된 책 코너가 한쪽에 있다. 한국어 코너도 있었는데, 아마 주민들에게 기증을 받아 비치한 것이 아닌가 싶다.

20210918_161616.jpg 한국어 책 코너도 있다

한국처럼 도서관 출입은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책을 빌리려면 도서관 카드를 만들어야 한다. 오렌지 카운티 공공 도서관 시스템에 들어가서 인적사항을 입력하고 카드 신청을 한 후 신분증을 제출하니 얼룩말이 그려진 예쁜 디자인의 도서관 카드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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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카드와 도서검색 시스템


성인용 도서는 Fiction과 Non-Fiction으로 크게 분류되어 있었고, 청소년용(Teen) 도서와 어린이용 도서가 별도 코너에 진열되어 있다. 입구 쪽에는 신간 소설이나 논픽션을 소개하는 책꽂이가 있는 것도 우리나라 도서관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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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도서 코너와 청소년용 도서코너

청소년용 도서는 Older Teen과 Younger Teen으로 친절하게 나뉘어 분류되어 있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을 칭찬하고 축하해주기 위한 명예의 전당 같은 것도 벽에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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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용 도서 구분과 다독왕 명예의 전당


만화 코너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일본 만화(Manga)만 전시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만화를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s)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어쩐지 만화를 소설과 나란히 대접하는 느낌이어서 좋았다. 예전에 우리 어릴 때는 (또 나왔다. 라떼는 말이야) 만화를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유해한 불량식품과 동급으로 취급하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웹툰이 보편화되어서 좋은 대접을 받고 있지만.

한국의 만화나 웹툰이 번역되어 이곳에 소개되면 이곳 어린이나 청소년들도 좋아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마치 K-팝이나 K-드라마처럼 말이다. 이곳에 와서 만난 젊은 학생들이나 선생님들 중 K-드라마를 즐겨본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 가끔 대장금 같은 오래전 드라마 얘기를 하기도 해서 우리를 즐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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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코너의 일본 만화(Manga)를 Graphic Novels로 분류한다


눈길을 끈 것 중 하나는 직원들이 고른 추천 도서이다. 요즘 한국의 공공 도서관에서도 가끔 보는 기획인데, 이곳의 추천 도서 코너는 더 아기자기했다. 책들을 예쁘게 묶어 추천 이유나 어느 때 필요한 책인지를 자필로 적은 메모를 붙여놓았다. '아늑한 크리스마스', '자녀를 갖거나 갖지 않을 권리에 관한 책들', '야외의 모험', '아늑한 미스터리'처럼 말이다. 끈으로 묶고 손수 메모를 적은 정성이 따뜻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20211002_150434.jpg 입구 쪽에 있는 직원 추천 (Staff pick)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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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이 정성스럽게 묶고 자필로 추천이유를 적어 놓았다.


직원 선정 도서 중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이 있었다. 마침 9월 26일부터 10월 2일까지 '금서 주간(Banned Books Week) '이 있어 (예전) 금서 추천도 있었다. 사람들이 금서로 지정하려 했던 이유가 적혀 있었는데, <Speak>란 그림이 있는 청소년 소설(Graphic Novel)은 남학생들에게 반하는 정치적 관점과 주장이 포함되어 있어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공격적인 말과 노골적인 성적 표현으로, <All American Boys>는 오늘날의 민감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라고 적혀있었다. 금서라고 하면 더 읽고 싶어 지는 것 같다.

금서 주간의 유래에 대해 구글 검색을 해 보았더니 금서 주간 사이트 (www.bannedbooksweek.org)가 있었다. 금서 주간은 '읽을 자유'를 기념하여 매년 열리는 행사인데 1982년에 학교, 서점, 도서관에서 책을 금지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면서 시작되었다. 정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지향하며, 도서관 사서, 서점, 출판사, 작가, 교사, 독자 커뮤니티들 간의 연대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2021년 올해의 주제는 '책은 우리를 단결시키고, 검열은 우리를 나눈다(Books Unite Us, Censorship Divides Us)'이다. 정말 멋진 슬로건이다.

미국은 보수적인 사회이지만, 인권이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면에 있어서는 다른 성향을 보인다. 리버럴(Liberal)하다는 말속에는 진보적인 성향과 함께 국가로부터의 통제에 저항하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도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특히 사상과 관련한 금서가 많았고 최근까지도 국방부에서 금지도서 목록을 만들어서 문제가 되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책뿐만이 아니다. 영화, 가요까지 군사정권의 눈에 거슬리는 것들은 모두 검열을 해서 내용을 바꾸도록 하거나 금지를 했다. 검열과 금서는 단기간에는 통할 수 있지만 결국 사람들의 알고자 하는 권리와 욕구에 이길 수는 없다. 대표적인 금지곡인 아침이슬이 국민 노래가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이다.

20211002_150518.jpg 금서 주간 특집 추천도서들

어느 날에는 책 대출 창구 뒤에 있는 전광판에서 작가와의 대화 안내문을 보았다. 얼핏 보니 H-Mart(한아름 마트라고도 하며 미국 주요 도시에 있는 대형 한국 마트이다)라는 말이 보이길래 인근 어바인에 있는 H-Mart에서 열리는 행사인가 보다 하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구글 검색을 해보았더니 작가가 출간한 책 제목이 <Crying in H-Mart>였고, 온라인으로 열리는 행사였다. 작가 미셸 자우너(Michelle Zauner)는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나서 오레곤 주 유진(Eugene)에서 성장했고 지금은 유명한 뮤지션이 되어서 밴드 'Japanes Breakfast'의 리드 보컬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인이지만 절반은 한국인으로 성장한 그녀의 얘기가 궁금해졌다. 한국돈으로 3만 원이 넘는 책이었지만 바로 주문했다(내가 지금까지 헌책방에서 사모은 10여 권의 책을 다 합한 것보다 훨씬 돈이 많이 들었다). 책은 2014년에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추억을 엄마가 만들어 준 한국음식, 함께 가던 H-Mart 등과 연관 지어 떠올린다. 하지만 그냥 따뜻한 추억만 보여주지 않고 사춘기에 엄마와 대립하며 방황했던 조금은 아픈 기억도 솔직히 드러낸다. 나는 작가와의 대화에 참가 신청을 했다. 작가와 진행자가 대담을 하고 중간에 가끔 씩 채팅창에 올리는 독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나도 질문을 두 가지 올렸다. 두 번째 질문은 나의 사심이 들어간 질문이었다.

- '나는 책이나 레코드가 많은 집에서 자라지는 않았다'라고 했는데 무엇이 당신을 뮤지션으로 만들었나요?

-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출간할 계획이 있나요? (한국어 판이 출간될 때에 맞춰서 한국에 와서 공연도 하면 멋질 것 같아요.)

감사하게도, 두 가지 질문이 다 채택되었다. 미셸은 어릴 때 주변의 밴드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했으며 (안타깝게도) 책은 국내 한 출판사에서 번역 중이고 곧 출간된다고 했다. 터무니없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이 책을 번역해서 한국에 소개하면 어떨까 하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인정한다. 나는 꿈이 좀 야무진 편이다.

원래는 한 가지 질문을 더 올리려고 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질문이 좀 무례하게 들릴 수 있어서 욱이와 상의한 결과 제외했다. 삭제된 질문은 이랬다.

- 책에서 엄마가 만들어 주신 한국음식들에 대해 많이 얘기했는데, 정작 당신의 밴드 이름은 '일본식 아침식사(Japanese Breakfast)'네요. 어찌 된 일인가요?

욱이는 밴드 이름은 그냥 그들의 음악을 상징하는 것인데 보컬이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해서 꼭 '한국식 아침식사'라고 붙일 필요는 없지 않냐고 했다. 맞는 얘기였다. 일본식 아침식사라는 이름에 국적이나 출신을 따지는 나의 국수주의를 돌아볼 기회를 준 욱이에게 감사한다. 나는 미셸이 정말 책 출간에 맞춰 그의 밴드와 함께 한국에 와서 공연하기를 바란다. 이름이 일본식 아침식사인 것은 이제 아무 상관없다. (그래도 Korean Breakfast라고 했으면 한국 팬들이 더 많이 생길 텐데-아직 국수주의를 못 버린 라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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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인 뮤지션인 미셸 자우너의 책과 온라인 작가와의 대화화면(오른쪽 위쪽이 미셸)

또한 도서관 건물 내에는 주민들로부터 기증받은 책들을 싼 값에 파는 기증도서 책방, Friend's Bookstore가 있다. 이곳에는 연세가 드신 주민들이 책을 분류하여 라벨을 붙이고 판매도 하시는 자원봉사를 한다. 기증받은 책들을 분류하시는 할머니는 연세가 아흔 가까이 되어 보이셨는데 열심히 일을 하고 계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래서 인사를 하고 말을 붙여보았다. 오른편에 있는 종이 상자가 기증받은 책들이고 이걸 분류해서 왼편의 북트럭에 옮기는 작업을 하신다고 했다. 기증받은 책들이 매우 많아 보였다. 이 서점이 지속 가능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국의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철마다 많은 책들이 버려진다. 이 책들을 모으면 작은 도서관이나 기증도서 헌책방을 만들 수 있을 텐데. (하, 십 년만 더 젊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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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받은 도서를 싸게 파는 Friend's Book Store와 책을 분류하시는 자원봉사자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지역 도서관은 책을 통해 자유로운 생각과 지식을 나누는 곳이다. 요즘 나는 도서관에 오면 마음이 편안하다. 학창 시절처럼 입시 공부를 할 필요도 없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나 스스로와 마주하면 된다. 토요일 오후 도서관에서 나는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출판의 자유와 권리가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Books Unite Us, Censorship Divides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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