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우 선수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빠를 못 믿겠어요

by 라떼

나는 거짓말을 잘 못하고 마음에 없는 말을 잘 못한다, 고 생각한다.


물론 토크를 하다 보면 약간 부풀리거나, 요즘 말로 MSG를 넣는 경우는 있다. 그래야 얘기도 듣는 사람도 재미있으니까. 하지만 확실한 건, 없었던 일을 얘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아재들은 '라떼는 말이야~'하며 자신의 무용담을 자녀, 후배, 제자들 뿐만 아니라 나이가 적은 사람들 모두에게 들려주기를 좋아한다. 직장 회식에 가면 지겹도록 들었던 상사의 무용담을 또 적절한 반응과 함께 들어주어야 한다. 가끔은 나 또한 그런 상사가 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빛나던 전성기(요즘은 이걸 리즈시절이라고 한다)에 대한 추억이 있다. '내가 소싯적에는 말이야 예쁜 아가씨들이 줄줄 따라다녔어' 같은 오래된 청춘사업 버전부터 '40도가 넘는 사막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내가 사우디에서 일할 때'로 시작하는 해외사업 버전, '학교 생활 내내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는 확인할 수 없는 범생이 버전 까지, 사소한 재주나 외모부터 엄청난 업적 등 우리는 우리의 리즈시절을 흐뭇하고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물론, 대다수 무용담은 뻥이 50% 정도 섞여있다. 하지만 그 말은 결국 진실도 50%가 들어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누구나 없는 얘기를 지어내지는 않는다. 다만 부풀릴 뿐이다^^


테니스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한국 테니스의 희망인 권순우 선수가 옆 동네(물론 차로 두 시간 이상 걸리지만 이 정도는 미국에서는 옆동네 수준이다)에 와서 경기를 하는 데 안 가볼 수가 없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마침 수업도 없는 날이었다. 권순우 선수를 응원하고, 세계적인 선수들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아침 일찍부터 차를 몰아서 파리바 오픈 마스터즈 테니스 대회가 열리는 인디언 웰즈(Indian Wells)로 향했다. 마스터즈 대회는 4대 그랜드슬램 대회(즉 호주 오픈, 롤랑가로스, 윔블던, US 오픈) 바로 아래 급인 ATP 투어 1000 대회(우승하면 랭킹 포인트 1,000점을 얻는다)로 세계적인 선수들이 많이 출전하는 중요한 대회이다.

20211007_111154.jpg 인디언 웰즈 테니스 센터 입구- 테니스 파라다이스라고 쓰여있다

권순우 선수의 경기는 오후에 잡혀 있어서 그전에 다른 시합을 보기도 하고 유명 선수들이 연습하는 것을 보았다. TV에서 보던 세계적인 선수들이 내 눈앞에서 운동하는 것을 보게 되다니, 테니스 동호인으로서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여자 테니스의 최강자 중의 한 사람인 루마니아의 시모나 할렙, 키 169센티 미터의 작은 키로 세계랭킹 10위까지 한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슈바르츠만, 즈베레프, 치치파스와 함께 차세대 왕좌를 노리는 러시아의 루블레프, 직전의 US오픈 우승자 메드베데프 그리고 아시아 선수 최초로 그랜드슬램 결승에 올랐던 일본의 니시코리까지 모두 보는 호사를 누렸다. 두 시간을 달려서 온 보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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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나 할렙과 디에고 슈바르트만의 연습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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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랭킹 6위, 러시아의 루블레프(좌)와 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수인 니시코리 케이(우)


그리고 나에게 이 날의 하이라이트였던 권순우 선수의 경기를 보게 되었다. 권순우 선수가 출전하지 않았으면 나는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권순우는 내가 인디언 웰스에 온 이유였다. 권순우 선수를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 메인 코트가 아닌 작은 코트였지만, 우리 교민들도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경기 시작 전에 내가 '권순우 파이팅'을 외치자 다른 교민들도 따라서 응원을 해주었다.


20211007_131435.jpg 기도 팰라 선수에 맞서 1회전 경기를 펼치는 권순우 선수
20211007_131354.jpg 응원하는 나와 교민들을 바라보는 권순우 선수

2주 전에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아스타나 오픈에서 생애 처음이자 한국 선수로는 이형택 이후 18년 만에 ATP 투어 대회 우승을 차지 한 권순우 선수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접전 끝에 1세트를 따냈고 쉽게 이기고 2회전에 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기도 팰라 선수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끈질기게 권순우를 몰아붙여서 결국 2대 1 역전승을 거두었다. 경기 결과는 매우 아쉬웠지만 나와 한국 교민들은 마지막까지 권순우 선수를 힘껏 응원했다.

20211007_141448.jpg 경기 후 아쉬워하는 권순우 선수

바로 앞 대회에서 우승한 직후라 1회전 패배에 많이 실망했는지, 권순우 선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가방을 챙겨서 일어나 출구로 향했다. 그때 내가 외쳤다.

"권순우 선수 잘했어요."

그러자 다른 교민들도 환호와 함께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 응원 소리를 듣고 출구로 향하던 권순우 선수가 몸을 돌려 나와 교민들이 있는 쪽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욱이에게 자랑했다.

"오늘 권순우 선수가 져서 힘없이 돌아가는데 아빠가 힘내라고 했더니 손 흔들어주었어."

"아빠, 뻥 치시네. 설마 권순우가 아빠에게 손을 흔들었을까요? 관중들에게 흔든 거지."

"잘 들어봐. 권순우가 미안해서 고개도 잘 못 들고 돌아서 가려는 데 아빠가 잘했다고 외치니까 그제야 다른 교민들이 덩달아서 박수를 보냈던 것이고, 그래서 권순우 선수가 뒤돌아서 손을 흔들어준 거야."

"하하하 그러면 그렇지. 아빠에게만 손 흔들어 준 게 아니잖아요."

"아빠가 격려해준 것으로 시작된 거니까 그게 그거 아닌가."

"하 참,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빠 과장이 너무 심하시네."


모든 무용담은 과장이 있다. 하지만 그 속엔 진실과 진심도 함께 한다. 듣는 이들이 과장은 좀 알아서 감안하고 그 속에 든 진심을 위주로 들어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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