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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 Apr 26. 2023

30년 후에 가 본 남도답사일번지 2

영암 월출산 도갑사

* 이 글은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바이블로 삼아 철저히 책의 내용에 의존하여 쓴 글이며 책이 발간된지 30년이 지난 현재의 모습을 담아 비교하며 서술하였다. 그래서 제목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따라하기이다.


내 남도답사의 첫 방문지는 영암 월출산의 도갑사였다. 월출산 얘기부터 안 할 수 없다. 유홍준 교수님은 책에서 월출산을 이렇게 묘사한다.


'일행은 모두 육중하게 다가오는 검고 푸른 바위산의 준수한 자태에 탄성을 지른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월출산은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완만한 곡선의 산등성이 끊기듯 이어지더니 너른 벌판에 어떻게 저러한 골산(骨山)이 첩첩이 쌓여 바닥부터 송두리째 몸을 내보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신령스럽기도 하고, 조형적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대단히 회화적이다.'


나는 차를 타고 지나 다니면서 월출산의 겨울과 봄을 보았다. 유홍준 교수님이 얘기했듯이 누구나 한눈에 월출산이 여느산과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바위들이 솟은 모습이 웅장하다. 오르기가 쉽지 않겠구나라는 느낌도 준다. 따로 날을 하루 잡아서 월출산에 오르리라 마음 먹으면서 도갑사로 향한다.

월출산의 겨울

도갑사 오르는 길은 4월의 신록이 푸르게 우거져 상쾌하다. 왼쪽으로는 작은 계곡이 있고 폭포도 있어서 청량한 물소리를 들려주는데 잠시 내려가 보기를 권하고 싶다.

도갑사 올라가는 길(왼쪽에 보이는 정자쪽으로 내려가면 계곡이 있다)
도갑사 올라가는 길 계곡의 작은 폭포(용수 폭포)

도갑사에서 처음 만나는 해탈문은 국보5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주심포와 다포양식이 공존한다는 것이 주요 이유라고 한다. 주심포와 다포는 뭘까, 찾아보았다. 지붕을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올리는 것을 공포라고 하는데 주심포는 기둥위에만 이 공포를 얹은 형식이며 다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놓아 처마의 하중을 받도록 한 형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홍준 교수님은 책에서 이 해탈문을 국보로 지정한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단순히 오래되었거나 드물다고 해서 국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아마 미적인 면에서 국보급은 아니라고 생각하신 게 아닐까 싶다. 나야 보는 눈이 없으니 알 수 없지만 절 입구의 여느 출입문 보다는 위엄있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근래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절 일주문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도갑사 해탈문
도갑사 일주문

유홍준 교수님은 도갑사 경내가 소담스러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서 더욱 정감이 간다고 했다.(아래 사진 참고) 하지만 30년이 흐른 지금 도갑사는 예전의 소담스러운 분위기는 아니다. 절집들도 많이 들어서고 훨씬 넓어졌다. 교수님은 책에서도 '조용했던 산사들이 너나없이 장대하게 보이려고 밀어제끼는 허장성세의 유행이 도갑사에도 미치어'라고 절의 거대화를 비판했다. 하지만 절도 하나의 종교적인 조직인데 조직의 원리라는 것이 늘 확장을 추구하고 그래야 구성원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작은 산사로만 남아있으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니 추억속에 남아있는 소담스러운 절 풍경을 오늘날에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실린 도갑사 경내 사진
도갑사 경내
대웅전 오른편의 절집들
대웅전과 석탑

책에 나온대로 대웅전 뒤쪽 대밭을 지나 월출산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미륵전으로 향했다. 교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아주 가난하게 생긴 옛 당우'라고 했다. 이 절집에는 미륵 대신에 보물 89호인 고려말의 석조 석가여래상이 있다. 책에는 '그 생김이 미남형을 보여주고 있고 개성적인 고려불상 중 잘 생긴 편에 속한다'고 했다. 실제로 보니 정말 미남형인데 뭐랄까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도 넉넉한(?) 미남형이다. 미륵전 안에는 유교수님이 책에서 '임옥상이가 납품한 것 같은 불화가 있어'라고 독창성을 칭찬한 탱화가 있어서 찾아 보았다. 내 안목으로는 평가할 수 없지만 색채의 느낌이 중후해 보였다. 책에 나와 있지 않으면 내가 이 탱화를 찾아 볼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책의 덕분이다.

 

도갑사 미륵전
도갑사 미륵전 안의 석조 석가여래 좌상(보물 89호)
미륵전 안의 신중탱화(유교수님이 임옥상 작가가 납품한 것 같은 불화라며 높게 평가했다)


산 위로 조금 올라가면 도갑사를 일으킨 도선과 중창한 수미 선사 두 분의 공적을 새긴 도선국사비가 있다. 비석의 규모가 크고 비석을 받치고 있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고 있는 돌거북도 생동감이 넘친다. 또한 비석 옆면에도 아름다운 무늬를 새겨놓아 미적가치를 높이고 있으며 용머리 부분도 매우 정교하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같은 절의 수미왕사비와 비교해보아도 규모와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제작에 17년이 걸린 이 비석이 겨우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유교수님은 책에서 아쉬워했는데 지금은 보물 1395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니 아마 책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후에 문화재청장도 지내셨으니 문화재 지정과 관리에 영향을 많이 미치셨을 것이다) 또한 책에 나온 사진에는 비각도 없이 노출되어 이끼가 낀 모습인데 지금은 비각을 잘 지어놓고 비석을 받치고 있는 돌거북도 깔끔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이 비석의 보존에도 문화유산답사기 책이 큰 기여를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이런 말이 나왔다.

"알게되면 더 잘 보존하나니."

도선국사비와 비각
도선국사비
도선국사비의 옆 모습
도선국사비 윗부분의 용머리 부분
도갑사 수미왕사비(유형문화재 152호, 영암출신인 세조 때의 승려로 도갑사의 발전에 기여한 수미왕사를 기리는 비석이다)

그런데 도선국사비의 입안을 자세히 보면 관람객들이 던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전과 지폐가 들어있다. 기복신앙의 작은 폐해라고 넘겨버리기에는 문화재를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 기복신앙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이번 답사여행에서 가 본 모든 절에도 한장에 만원하는 기와불사 접수대가 있었다. 복을 기원하는 방문객들의 마음과 돈을 벌어 대규모 불사를 진행해야 하는 절의 입장이 맞아 떨어진 것이겠지만, 늘 이런 장면을 보면 씁쓸하다. 불교가 토속신앙과 결합되었고 그 결과로 절에 산신각 같은 절집이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일이지만 지나치게 기복적으로 변하는 것은 보기 좋지 않다. 물론 이것은 신도를 늘리고 시주를 많이 받아야 하는 현실불교 사찰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내 순진한 생각일 수 있다.    

도선국사비 돌거북의 입안에 들어있는 동전과 지폐들

책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도선국사비 왼쪽에는 승려들의 사리를 모신 부도탑들이 모여 있다. 단정하면서도 소박한 부도들을 보면 그 시절 스님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도선국사비 옆 부도들


이렇게 내 남도답사일번지 기행의 첫 여정인 도갑사 답사를 마치고 이제 월출산 주위를 반바퀴 돌아 월남사지로 넘어간다.   

(차로 도갑사를 나서는데 혼자 배낭을 매고 걸어서 내려가는 분이 보였다. 대중교통으로 왔는데 월출산 등반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마침 가는 방향이고 해서 영암버스터미널까지 태워드렸다. 요식업에 종사한다는 그 분은 주말에도 돌아가면서 쉰다고 했는데 소중한 토요일 하루를 들여 대중교통편으로 영암까지 내려와서 산행을 한 정성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역시 여행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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