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영랑생가
강진읍내에 있는 영랑생가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저물고 있었다. 관람시간이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 볼 수가 없었고 담장 밖에서 사랑채와 집 내부를 들여다 볼 수 밖에 없었다. 초가 지붕을 재현해 놓았고 제법 규모가 큰 집이라 영랑의 어린시절이 유복했음을 짐작케 한다.
책에 '작위적 발상이 가상스럽다'고 소개된 바와 같이 입구 화단에는 모란꽃을 심어놓았다. 이 모란꽃 화단은 뒤에 소개할 모란공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유교수님이 작위적이라고 했으나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로 유명한 김영랑을 생각나게 하는 꽃이 모란인데 이 모란꽃을 통해 영랑을 알리는 스토리텔링은 강진군으로서는 당연하기도 하고 성공적이라고 생각되었다.
책에 '육중하고 촌스러운 자태로 이 집의 운치를 다 망쳐놓았다'며 비판한 1988년 작 영랑시비는 보이지 않았는데 유교수님의 일침으로 군에서 치웠는지 아니면 내가 안에 들어가지 못해서 못 본 것인지 모르겠다. 다음에 낮에 방문하면 다시 찾아보리라 생각했다.
책에는 영랑생가 주변에 모란 아파트가 있고 영랑화랑도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고 대신에 영랑 빌라가 보였다.
모두 알고 있듯이 김영랑은 향토적 분위기의 서정시로 '북의 소월, 남의 영랑'이라는 칭송을 받은 시인이다. 김윤식이 본명이며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휘문의숙에 다니던 중 3.1운동 때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부자집 아들로서 어려움 없이 자랐을텐데 3.1 운동에 몸을 던질 정도면 의기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일본유학 중에 귀국하여 결혼하고 1930년 정지용, 정인보, 이하윤,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지를 창간하여 활동하였다. 책에서 새롭게 안 사실은 1945년 해방공간에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여 강진 대동청년단장으로 활동하였고 한국전쟁 때 은신해 있다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3.1운동과 해방공간의 우익운동으로 짐작컨데 그의 서정적인 시와 달리 성격은 꽤 현실참여적이었던 것 같다.
책에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김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 소개되어 있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우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을 살포시 젓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앞서 언급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모란이 피기까지는>도 감상해보자.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뼏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는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하지만 유홍준 교수는 영랑의 시, 더 나아가서는 순수예술을 주장하던 문인과 여기서 파생된 소위 향토적 서정주의 예술에 대해 맹렬히 비판한다.
'영랑의 시가 향토적 서정과 민족적 운율을 동반한 영롱한 서정시라는 것은 문학사가들의 해설이 없어도 알겠고 또 실수 없이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서정의 발현이라는 것이 이렇게 파리하고 맥빠질 수 있겠는가? 모란이 피기까지 그가 기다린다는 것은 고작 찬란한 슬픔의 봄이었다. 그런 식의 정서발현이란 감상의 과소비밖에 안될 것이니, 클리넥스 홑껍질보다도 근수가 덜 나갈 이 가벼움을 티없이 맑다고 표현하기는 싫다.'
또한 그는 향토적 서정주의 예술에 대해서도 일갈한다.
'속알갱이는 송두리째 일제에 빼앗겨버린 식민지적 현실을 극복할 비전과 의지는 상실한 채 형식에서만 향토적 빛깔과 맛을 찾으면서 그것이 민족적 아이덴티티라고 믿으려고 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랑의 시에서 차라리 측은한 인간적 상실과 좌절의 비애가 느껴지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의 글이 재밌는 이유 중 하나는 이것 저것 재지않고 본인의 견해를 과감히 드러낸다는 것이다. 한 작가를 두고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문화비평가라면 자신의 소신이 있어야 하고 이를 눈치보지 않고 피력할 수 있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유홍준 교수가 그런 분이라고 생각한다.
영랑의 시에 대해 유교수님이 한가지 더 언급한 것은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음악성이었다. 유교수님은 영랑 시의 음악성을 정지용 시의 회화성과 대비했는데, 정작 노래로 많이 만들어진 것은 정지용 시라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유교수님은 그 이유를 영랑의 시어 자체가 운율을 지니고 있어서 음악적으로 변주할 폭이 좁아졌거나 영랑 시의 운율성이 향토적인데 서양음악이라는 이질적인 문법으로 접근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추측하고 있다.
밖에서만 영랑생가를 기웃거리다보니 날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영랑생가 옆에는 영랑이 속했던 시문학파 기념관이 있었는데 이 또한 관람시간이 지나 볼 수 없었고 다음에 다시 와서 정지용 등 시문학파의 시 세계를 만나보리라 생각했다.
생가와 기념관 사이로 난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다 보니 모란공원이라는 안내표지가 있었다. 별로 기대가 되지는 않았다. 그저 김영랑과 연결지어 공원에 모란 좀 심어놓았을 거라는 예상을 한데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서 어떤 곳인지 확인 정도만 하려고 올라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공원의 규모는 컸고 밤에도 볼 수 있도록 조명이 잘 설치되어 있어 놀랐다. 30년 전에 쓰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당연히 없는 곳이지만 30년 후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따라하기에는 실릴만한 곳이었다. 공원 입구의 왼편에는 대숲이 펼쳐져있고 길가에는 흰 모란꽃이 심어져 있었는데 대숲의 정취가 마음에 들었다.
모란공원에는 김영랑의 작품 중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가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인가 교과서에서 이 시를 접했던 기억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유홍준 교수님은 책에서 고작 기다린다는 것이 '찬란한 슬픔의 봄'이냐고 비판했지만 일제강점기에 기다릴 것이 슬픔의 봄밖에 없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보, 세월이 지나 영랑생가가 사적지가 되고 모란 공원까지 멋지게 만들어진 것은 모두 이 시 한편의 덕이다.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시비도 있었는데, '오메 단풍들것네'로 잘 알려진 시였다. 예전에 김용택 시인의 글에서 봄에 연두빛 신록이 앞산을 물들이면 시인은 밤잠을 못이루고 마음이 설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이 감성을 이 한마디로 표현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아따 저 산 좀 봐야."
모두 남도 사투리의 매력이기도 하다.
(낮에는 못 봤지만) 공원은 밤에 더 예쁜 것 같았다. 일정이 늦어져 우연히 해저물고 도착했는데 뭔가 특별한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공원 내에는 인공폭포도 있고 갖가지 조명으로 아기자기한 정원이 있었다. 김영랑 시집을 한 권 읽은 후 들고와서 이 공원에 앉아 다시 시들을 음미하면 좋을 공간이다.
이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따라하기가 기대되었던 이유 중에는 맛집도 있었다. 특히 책에서 소개한 3대 한정식집 중 하나인 그 유명한 해태식당에 가서 맛있는 남도 한정식을 먹어보는 것이 이 중 으뜸으로 기대되는 일이었다. 허나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일이 있단 말인가. 찾아간 해태식당에서는 2인 이상만 주문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무적으로는 이해 가는 일이었지만 남도답사 중에 특별히 기대하며 찾아온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반찬의 양을 줄여서 멀리서 온 여행자의 1인 식사도 가능하게 할 수는 없을까, 생각하면서 그 앞집인 명동식당으로 가보았다. 여기도 손님들이 들어차 있는 것을 보면 유명 맛집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곳도 1인 식사는 불가였다.
유명 한정식집에서 1인 식사를 거절당한 후 아픈(?) 마음을 안고 인근 거목촌 이라는 백반집에 들어갔는데 여긴 1인 식사가 되었지만 사장님은 퇴근하시려는 타이밍이었다. 잠깐 난처한 표정을 짓던 사장님은 백반 일인분을 차려주셨고 나는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혼자 먹는 사람을 받아주는 식당에 감사하며 맛있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