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다산초당
강진읍내에 있는 영랑생가와 모란공원을 본 다음날, 다산 초당으로 향했다.
유홍준 교수님은 강진이 남도답사 일번지로 불리는 것은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지가 여기였고, 목민심서를 비롯한 그의 유명한 저서들이 이곳에서 집필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했다. 다산은 읍내에서 8년을 살고 나머지 10년을 다산 초당에서 살았다. 책에 소개된 다산신계라는 책의 내용 중에는 다산이 처음 강진에 왔을 때 백성들이 모두 겁을 먹고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고 달아났다는 내용이 있다. 한양에서 유배온 죄인에 대한 경계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첵에는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 이정표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군부대 입간판을 보고 찾아가야 했던 일화와 좁은 비포장 농로길로 올라가야 해서 비라도 오면 낭패였고 마주 오는 시외버스를 만나면 엄청난 낭패가 되던 얘기가 소개되어 있다. 지금은 부근 도로에 다산초당이라는 이정표가 잘 되어 있고 아랫마을인 귤동마을에서 올라가는 길도 잘 닦여있다.
유교수님은 책에서 90년대 이전에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던 귤동마을이 당시 별장들이 들어서면서 양옥에 돌담이 생긴 것을 애석해했다. 하지만 어찌 한 마을이 그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다산 초당이라는 훌륭한 유적지가 인근에 있어서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는 마을일진대 옛 마을의 정취를 너무 사랑하시는 바람에 조금 비현실적인 바람을 가지신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에 가 본 귤동마을은 물론 책 출간 당시에 비해서도 많이 달라졌고 현대식 펜션들도 보였지만 한옥들과 돌담이 있는 마을길의 정취가 다산초당 아랫마을로서의 경관을 크게 해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귤동마을을 지나 다산초당이 있는 다산을 오른다. 책에는 이 길이 청신한 바람이 불고 대밭과 소나무가 무성하여 어둡고 서늘했었다고 했는데 울창했던 대밭과 솔밭을 당시에 솎아내어 훤해졌다는 내용도 있다. 지금은 어둡지는 않고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는 느낌의 길로 초입에는 대나무 울타리와 마닐라 삼으로 만든 매트도 깔려있었다.
다산 초당으로 오르는 길을 가다 보면 책에서 언급된 윤종진의 묘를 지나게 된다. 윤종진의 아버지 윤규로는 정약용이 강진읍내 주막집과 절집으로 떠돌고 있을 때 다산으로 올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다. 윤종진은 다산이 이곳에 와서 양성한 18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 경기도 광주로 돌아간 후에는 제자 18명으로 이루어진 다산계를 조직하여 다산에게 평생 차를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
책에서는 이 묘의 동자석을 사진과 함께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얼굴형이 아주 야무지면서도 귀엽고, 경쾌한 단순화 작업이 자못 현대적 감각을 풍긴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나는 올라갈 때 묘를 지나면서 이 동자석을 놓쳤고 내려올 때에 찾아보았다. 이 또한 책이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유물인데 단순해 보이지만 해학미가 느껴졌다. 책에서는 귀가 크고 귓불이 넓으며 눈동자가 은행알 같은 형태의 이 같은 석인상은 강진, 해남, 장흥지방의 양식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숨이 차오르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드디어 다산초당이 나온다. 책에도 설명된 바와 같이 원래 초가집이었던 것을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번듯한 기와집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유교수님은 원래 초가 오막살이였던 집 대신에 너무 큰 기와집을 지어놓아 못마땅하다고 책에서 얘기하셨는데 비록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지만 지금은 주변터와 어울려 보였다. 책에 주변숲이 울창해서 어두침침하다고 했는데 지금은 터를 조금 넓혔는지 어둡지는 않았다. 다산의 유적지를 찾아온 많은 방문객들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초당 옆에는 전통연못 양식인 방지원도(네모난 연못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는 형태)의 연못이 있고 물길 입구에는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대나무 수로로 연결하여 작은 폭포를 만들어 놓았는데 다산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한다.
초당 왼편의 바위에는 다산이 직접 새긴 정석이라는 글자가 있고 책에도 소개되어 있는데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방문객들에게 당시 정약용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산속 초가에서의 유배생활에 흔들림도 많고 고뇌도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글자로라도 새겨놓아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고자 했을 것이다. 바위에 새긴 두 글자에서 그의 인간적인 고뇌가 보이는 듯하다.
책에는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이 쓴 현판 글씨를 비교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다산초당을 바라보고 오른편의 연못을 지나 동쪽에 자리 잡은 동암에는 두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다.(진품이 아니라 복사품일 거라고 생각했다)
추사는 다산보다 24세나 연하였다고 한다. 그의 문집에는 정약용에게 경학의 가르침을 받는 편지가 두 통이나 실려 있다고 하니 그는 다산을 학문적으로 존경한 듯하다.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뜻의 보정산방 현판 글씨는 유교수님이 '글자의 구성과 획의 변화에서 능수능란하고 자유자재로워 멋대로인 듯하지만 질서가 있고 파격을 구사했는데도 어지럽지 않다.'라고 했고 '프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경지였다'며 추사의 중년 명작으로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반면에 다산동암이라고 쓰인 현판은 정약용의 글씨를 집자한 것인데, 유교수님은 학자로서의 그의 글씨를 '프로가 아니면서도 프로글 넘어서는 아마추어리즘의 승리를 보여주는 일면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며 '해맑은 느낌이 마치 천고의 무공해 글씨체 같기도 하고, 술에 곯아떨어진 다음날 아침 밥상에 나온 북엇국 백반 같기도 하다.'라고 평하고 있다.
대담하고 능수능란한 추사의 서체와 단아한 규율과 법도를 지키면서도 해맑은 다산의 서체를 통해 두 사람의 성품을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물론 이 또한 유교수님의 책이 없었으면 그냥 휙 보고 지나쳤을 수도 있다. '읽은 만큼 보인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책에는 정약용이 부인 홍 씨가 보내준 헌 치마폭에 그린 그림과 글씨가 소개되어 있는데 가족과 분리되어 외롭고 애절한 그의 마음이 느껴진다. 아내의 마음이 담긴 붉은 헌 치마, 이것을 잘라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 아들과 딸에게 주는 그의 마음에 멀리 떨어져 주말부부를 하는 나의 마음이 감정이입되어 애절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 지 수년 됐을 때 부인 홍 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부쳐왔는데,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빛이 가셨기에 가위로 잘라서 네 첩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 나머지로 이 족자를 만들어 딸아이에게 준다'
동암을 지나면 백련사로 오르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 입구에 바로 천일각이 있다. 책에도 사진과 함께 소개된 정자로서 다산이 여기 머무를 당시에는 없었던 건물이지만 당시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지점에서 다산도 바다를 보며 향수를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에 강진군에서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강진만 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길은 백련사로 이어지는데 다음 편에 다룰 이 길은 다산이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교류하며 유배로 답답한 숨통을 틔웠을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