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백련사
다산초당 천일각에서 만덕산 자락에 난 길을 통해 백련사로 넘어갔다. 책에서도 산책길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오솔길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오솔길이라고 하기에는 폭이 넓을 정도로 산길이 잘 닦여있다. 이 길은 다산이 유배시절에 인간적, 사상적 영향을 주고받았던 백련사의 혜장스님을 만나던 길로 알려져 있다. 길 옆에는 야생 차나무가 흔하게 있는 걸 볼 수 있었는데 왜 이 산을 다산이라고도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다산과 혜장의 일화를 알려주는 안내판도 있었다. 이 내용에 의하면, 다산이 유배 온 지 3년이 지난해에(그때는 다산이 강진 읍내의 주막집에 기거할 때이다) 혜장이 다산을 먼저 만나고 싶어 했고 다산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혜장을 만나러 가서 주역에 대해 밤이 깊도록 얘기를 나누었고 이것이 교류의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이 아버지를 만나러 강진에 왔을 때 보은산에 작은 선방하나를 마련해 주었고 이를 보은산방이라 하였다. 다산은 이곳에서 겨울을 났고 이년 후에 다산초당으로 옮겼으니 추측컨대 강진 읍내에 있을 때부터 인연을 맺은 혜장스님이 있는 백련사와 가까운 곳에 다산초당이 마련된 것은 우연이 아닌 듯싶다. 하지만 1811년 혜장은 40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고 다산은 슬퍼하며 그의 비명을 쓰고 시를 지었다.
나는 이 길을 걸으며 유배생활 중에 벗을 찾아가는 다산의 심정을 헤아려보았다. 혜장과의 교류는 다산에게는 숨 쉴 수 있는 구멍과도 같았으리라.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는 이등병의 편지 노래에 나오는 구절처럼 당시 다산은 친구 한 사람, 한 사람이 절절하게 그리웠을 것이다.
정약용도 오죽하면 다산이 호일 정도로 차를 즐겨한 것 같다. 혜장은 백련사 부근에서 재배한 차를 다산에게 보내기도 하였고 다산이 혜장에게 차를 보내달라는 시를 지어 보내기도 했다. 또한 앞서 다산초당 편에서 얘기했듯이, 윤종진을 비롯한 그의 18명 제자들이 다산계를 조직하여 차를 정약용에게 보내기도 한 것으로 보아 다산의 차 사랑이 대단하지 않았나 싶다. 강진다원 편에서 말했듯이 커피를 줄이고 차를 마셔보리라고 한 내 생각은 아직 실천 중인데 가끔 커피의 힘에 밀리고 있다. 차를 마시며 가끔은 다산을 생각해 보리라. 백련사에 거의 다다를 즈음 오른편으로 차밭이 나오고 찻잎을 따는 아낙들의 모습이 보였다.
책에서는 만덕산의 봄을 극찬하고 있다.
'남도의 원색, 조선의 원색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구강포의 푸른 바다, 아랫마을 밭이랑의 검붉은 황토, 보리밭 초록물결 사이로 선명히 드러나는 노오란 장다리꽃, 유채꽃밭, 소나무 그늘에서 화사한 분홍을 발하는 진달래꽃 (후략)'
나는 유교수님이 얘기한 이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었지만 구강포가 보이는 봄날의 만덕산 자락을 걸으며 그 아름다움의 한 조각을 느낄 수 있었다.
만덕사에 도착했다. 부처님오신날이 한 달이나 남았지만 절 입구와 절의 현관문 격인 만경루, 그리고 대웅전 앞에는 벌써 연등을 걸어놓아 축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백련사는 책에 소개된 바와 같이 강화도 정수사, 김제의 망해사와 함께 바다를 내다보는 호쾌한 경관을 가진 절이다. 유교수님은 승주 선암사 못지않은 정갈한 분위기가 방문객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나 가람배치에 대해서는 얘기가 달라지는데, 유교수님이 가 본 절 중에서 '가장 거만스런' 배치를 갖고 있으며 '의젓한 풍모를 과시하는 자태가 때로는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불친절한 인상을 주는 곳'이라고 까지 표현하며 '기골이 장대한 무인의 기상이 풍긴다'라고 하셨다. 거만스런 느낌의 이유로 유교수님은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는 만경루가 위압감을 주며 절 안으로 들어가려면 만경루를 빙 돌아가야 하는 불친절함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책에 나온 30년 전 사진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만경루 주위는 좀 더 아기자기하게 보였고 통로가 뚫려있어 나는 크게 위압감을 느끼지는 못하였다. 통로가 언제 뚫렸는지 궁금하여 일하시는 분께 물었더니 원래부터 뚫려있다고 했다. 하긴 30년 전부터 근무하신 분이 이제 몇 분이나 남아계실까 싶었다.
신라말기에 지방호족들이 세운 절 중 하나인 백련사는 13세기 초 고려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호응하여 불교계에서 벌였던 결사운동을 통해 유명해졌다. 보조국사 지눌이 조계산 송광사에서 수선결사를 맺으며 조계종을 세우던 시기에 지눌의 친구인 원묘스님은 백련결사를 조직하여 천태종의 법맥을 이어가게 된다. 원묘스님은 최 씨 무신정권과 밀착된 지방호족의 후원을 받아 7년간의 불사 끝에 백련사를 창건하였고 이후 120년간 8명의 국사를 배출하는 영광을 누린다.
하지만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이 극심하여 해안 40리 안쪽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자 백련사도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조선왕조가 들어섰으나 숭유억불정책으로 중창되지 못하고 임진왜란 이후 불교가 민간신앙으로 중흥하면서 행호스님이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중창하게 된다. 행호스님은 백련사를 중창하면서 다시 있을지 모르는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절 앞에 토성을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동백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그늘을 이루고 있었다. 책에는 철책이 설치되어 못 들어간다고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고 산책로도 나 있었다.
만경루와 대웅보전의 현판은 당대의 명필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이광사의 필체는 획마다 마치 물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책에서 유교수님은 백련사에 오르면 대웅전 기둥에 기대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든지, 스님의 용서를 받고 만경루에 올라 누마루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아야 이 절집의 참맛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여기 유교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실행에 옮긴 사진들이 있다. (만경루는 방문객들에게 너른 마루를 개방하고 있으니 스님의 용서까지 받을 필요는 없다^^)
책에서 유교수님은 '백련사 만경루가 답사객에게 불친절하게 보일 정도로 가파른 비탈을 이용하여 세운 이유는 바로 만덕산 자락에서 구강포로 이어지는 평온한 풍광을 끌어안기 위함이었던 것이다'라고 하며 관객의 입장이 아니라 사용자의 입장에서 집을 바라보아야 그 건축의 본뜻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절에서 살며 수행하는 스님들의 관점에서 지은 절이 바로 백련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