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월남사지와 강진다원
영암 도갑사에서 월출산 주위로 반바퀴쯤 돌면 강진군 성전면에 있는 월남사지가 있다. 책에서는 영암에서 강진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인 풀티재를 소개하고 있는데 평소에 차를 타고 지나며 보던 이 고개이름이 비로소 의미있게 다가온다. 스토리텔링의 힘이라고나 할까. 어떤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야기의 힘이다.
월남사는 고려시대 진각국사 혜심이 창건했다고 한다. 월남사지에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월남사지 삼층석탑이다. 책에서는 '월출산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자리에 세워졌고, 고려시대의 탑이지만 백제양식이라는 이 고장의 특징이 잘 살아나 있다.'고 하였다. 책에 사진으로 나온 탑의 30년전 모습은 주변 절터를 비롯해서 탑 자체가 잘 관리되고 있지는 않은데 지금은 주변 절터가 발굴되었고 일대가 정원처럼 가꾸어져 있는데 대웅전 복원 공사가 진행중이라 공사중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절터를 안내하는 표지판 내용에 의하면, 월남사는 발굴조사 결과 금당을 중심으로 한 쌍탑형식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이런 배치는 주로 통일신라 후기의 형식인데 고려시대의 절에 이런 형식이 사용된 것이 이례적이고 탑의 형식이 학술적 가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새로 짓고 있는 이 대웅전이 경관을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공사중인 대웅전은 꼭 지어야 했을까. 월남사지는 말 그대로 절터로 남겨두면 안될까. 물론 월남사를 다시 중건하여 옛 영화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는 알겠으나, 옛 모습대로 만들기는 어려울터, 그냥 탑만 있는 절터로 남겨두는 것이 경관면에서나 문화재로서의 가치면에서나 나을 것이다. 아래의 사진에서 새로 짓는 대웅전이 빠진다면 보다 주변경관과 더 잘 어울리는 풍경이 나올 것이다.
유홍준 교수님은 책에서 월남사터 일대가 재벌회사의 연수원 때문에 동강이 나고 말았다고 했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연수원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절터가 공원처럼 잘 가꾸어진 모습이었다.
책에서는 월남사터를 명당이라고 했다. 월출산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멀리 보이는 월출산의 뾰족한 봉우리와 바위들이 마치 도봉산 같다고 하며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가며 이곳을 지나다가 쓴 시를 소개하고 있다.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 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내 눈에도 봉우리들은 도봉산과 비슷했다. 책에 나온 정약용의 시를 생각하며 보니 서울이 고향인 나도 고향의 북한산이 생각나서 그리움이 돋아났다. 천리 유배길에서 본 고향의 산과 닮은 봉우리들 속에서 느꼈을 그 한과 서글픔이 내게도 전해졌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유배길의 마음속에서 자연은 더 서글퍼서 아름다웠을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에 '풀한포기 친구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고 한 것도 이런 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월남사를 창건한 진각국사를 기리는 진각국사비는 깨진 모습으로 돌거북 위에 얹혀있었다. 책에서는 '돌거북의 얼굴이 용머리 형상으로 힘이 장사로 느껴지며 고려 조형물의 특정이 완력과 괴력의 강조가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자세히 보니 거북의 머리가 힘이 있고 용맹하게 느껴진다. 아마 책을 안 읽었으면 이 비석은 찾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또 한번 느꼈다.
월남사지에서 무위사로 넘어가는 길에는 우연히 찾은 선물(Serendipity라고 하던가)이 있었다. 지도 앱에서 월남사지와 무위사를 검색하다가 발견한 녹차밭 보성다원이다. 월남사지에서 보성다원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강진군 성전면의 봄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가서 축제를 즐기지는 못했지만 행사장 입구의 꽃장식을 보며 버스킹은 잠깐 들을 수 있었다.
무위사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나는 작은 탄성을 질렀다. 길 양쪽으로 푸른 녹차밭이 끝없이 펼쳐져있었기 때문이다. 녹차하면 생각나는 곳이 보성이고 오래전에 보성 녹차밭에 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강진의 녹차밭에 거는 기대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이곳을 과소평가했던것이다. 녹차밭은 예상보다 훨씬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곳 강진다원은 일교차가 크고 안개가 많아 차 재배의 적지이며 생산된 차는 떫은 맛이 적고 향이 강해서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국내 최초의 녹차 제품이 생산되었고 화장품 회사인 아모레퍼시픽 계열사인 (주)오설록에서 1980년부터 산간 지역을 개간하여 10만평 규모의 큰 다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다만, 전체 차밭의 약 80%는 일본 품종이고 약 20%만 재래종이 재배되고 있다고 한다.
이번 답사지인 강진과 해남은 차 문화의 중심지로서 차에 얽힌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차 문화의 창시자로 알려진 초의선사 얘기도 대흥사 편에서 기대하시라.
드넓은 녹차밭을 보니 커피에 중독되어 녹차를 멀리하고 있는 나를 반성하는 마음이 생겼다. 개인의 기호에 따라 마시는 것이고 커피 애호가들의 취향도 존중하지만 하나의 유행처럼 하루에 몇 잔씩 마셔대는 커피가 좋은 것인가 생각해본다.(오늘도 두 잔 마셨다 ㅠ) 커피의 대유행(?)으로 녹차 산업이 타격을 입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들은 얘기로는 차로 마시는 용도 외에 화장품 원료로도 많이 쓰인다고 한다. 커피를 줄이고 녹차를 더 마셔보리라 생각하며 강진다원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