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대흥사 1
30년 후에 가 본 남도답사일번지
유교수님의 해남 두륜산 대흥사 이야기는 유선여관의 영리한 개 '노랑이'로 시작한다. 나도 개 이야기로 시작할까 한다. 유선여관은 당시 장작불을 때는 전통한옥으로 유교수님의 단골 숙소였다고 한다. 노랑이는 손님들이 두륜산을 등반할 때 따라나섰다가 하산할 때까지 안내해 주는 영특한 개로 소개된다. 지금 물론 노랑이는 없지만 노랑이의 후손들이 부근에 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나는 대흥사에서 작은 개를 한 마리 만났는데 순해서 잘 따랐다. 보살님에게 물어보았더니 절에서 키우는 개라고 했다. 혹시 얘가 노랑이의 후손일지 누가 알겠는가^^
책에 유선여관의 사진은 없어서 옛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한옥의 형태를 살리면서도 내부는 현대식으로 개조된 펜션이 되어 있었고 카페 유선도 함께 있었다. 대흥사 입구 계곡옆이고 한옥이라 그윽한 정취가 있는 것 같아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나도 이곳 유선관에 한 번 묵어보고 싶었다.
대흥사는 국토 최남단의 두륜산의 골짜기들이 모여지는 '너부내'라는 평평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상 삼산면 구림리 장춘동이다. 유교수님은 이 동네가 아홉 개의 숲 '구림'과 긴 봄이라는 뜻의 '장춘'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봄의 대흥사도 좋지만 자신은 벌거벗은 나뭇가지들이 있는 겨울날의 대흥사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나에게 겨울에 한 번 더 와 볼 이유를 던져주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교수님이 책에서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소개했듯이 너부내 계곡을 따라 대흥사로 들어가는 10리 숲길은 큰 나무들이 만드는 터널과도 같아 속세의 잡념을 떨쳐버리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길이다.
책에 나온 대흥사 이름의 유래를 알아보자. 대흥사가 자리 잡고 있는 두륜산의 옛 이름은 '한듬'이었고 이를 클 대자를 써서 '대듬'이라고 했으며 나중에는 대둔산으로 불렸다. '한듬절', '대듬절'로 불리던 절 이름도 따라서 대둔사로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에 산 이름을 두륜산이라고 하고 대둔사는 대흥사로 바뀌게 되었다.
대흥사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도 하고 통일신라 말기의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등 설화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강진 백련사에서 다산 정약용과의 교우로 알려진 혜장 스님이 대흥사의 12대 강사로서 이 설화가 터무니없음을 실증했으며 초의선사도 설화를 부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흥사의 창건은 나말여초로 추정되는데 그 근거는 보물로 지정된 대흥사 삼층석탑과 두륜산의 북미륵암 마애불과 삼층석탑이 모두 나말여초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유교수님은 그런데도 대흥사를 소개하는 안내판에 설화내용이 사실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을 비판하셨다.
30년이 지난 지금의 안내판은 어떨까. 대흥사 창건의 세 가지 설을 소개하고 있다. 426년 정관존자(이때는 삼국통일 전이다), 514년 아도화상, 신라 말 도선국사가 각각 창건했다는 설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설이라고 하여 역사적 사실과 구분되어 있으니 큰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유교수님의 의견처럼 유물들의 양식으로 보아 나말여초로 추정된다는 표현이 들어가면 더 객관적일 것이다.
유선여관을 지나 올라가면 두륜산 대흥사라고 크게 쓰인 절 일주문이 나오고 일주문을 지나 오른편으로 고승들의 사리탑과 비석을 모아놓은 부도밭이 나온다. (책에는 천왕문을 지나면 부도밭이 나온다고 되어 있는데 사천왕상이 있는 천왕문, 즉 해탈문은 더 올라가야 있다) 서산대사 이래 13 분의 대종사와 13분의 대강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는 부도들은 한결같이 오래되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 이 절에서 수행한 스님들의 역사를 담고 있을 부도밭을 보며 절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었다. 유교수님도 다른 스님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서 이 중 초의스님(차 문화를 만든 분으로 조금 있다가 일지암에 얽힌 얘기에서 다룰 것이다)의 부도인 초의탑 앞에서만 잠시 멈췄다 가신다고 책에 적고 있다. 그 마저도 아는 바가 없는 나는 그냥 멀리서 부도들을 바라보며 지나갈 뿐이다.
해탈문을 지나면 본격적인 절의 경내로 들어가게 된다. 절의 경내는 매우 넓지만 뒤편으로 두륜산의 완만한 능선이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어서 포근한 느낌을 준다. 답사를 마치고 해 질 무렵 절을 나설 때 은은한 범종 이 울렸다. 나는 절과 두륜산을 한참 바라보며 서서 종소리를 들었다. 다시 속세로 돌아가는 내 마음을 채워 주는 평온한 범종소리에 답사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해탈문을 지나면서 들어서는 절 경내는 일단 넓이에 감탄하게 되고 다음으로 절 위쪽에 보이는 4월의 신록으로 물든 두륜산의 능선 모습과 그 위에 올라선 바위의 모습에 두 번째로 감탄하게 된다.
큰 절이지만 무염지라고 하는 연못도 있고 단풍나무, 배롱나무, 왕벚꽃나무를 비롯한 나무들이 있어서 정취를 자아낸다. 책에서 유교수님 제자가 '낭구하나는 장관'이라고 했다는 것이 이해되는 지점이다.
앞서 '낭구하나는 장관'이라고 말한 유교수님의 제자가 대흥사에 대해 '봐도 봐도 심심해 영 실망했다'라고 한 일화가 책에 대흥사에 관한 일화로 가장 먼저 소개가 되어있다. 여기에서 또 '아는 만큼 느낀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예로 든 것이 천불전의 창살무늬와 대웅보전 입구 돌계단의 도깨비상이었다. 이런 '보물'들이 곳곳에 있지만 일반인들의 시각으로는 찾아내기 힘들기 마련이다.
나 또한 책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당연히 그냥 지나쳤을 유물이었는데 지긋한 눈길을 꽤 오래 주며 '아는 만큼 느끼는' 나 자신에 우쭐(?) 하기도 했다. 천불전의 사방연속 창살무늬는 절집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멋을 낸 것 같았다. 소박한 듯하지만 한껏 아름다움을 과시하기에 유교수님이 높이 평가한 것이리라. 대웅보전 앞 계단의 돌사자는 인상을 쓰고 있는 듯한 무서운 얼굴이면서도 왠지 친숙한 느낌이었다.
책에는 이 절에 걸린 현판 글씨에 관한 이야기도 소개되어 있다. 대웅보전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고 무량수각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당시 조선의 글씨는 동국전체라고 하는 이광사의 서체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 서체는 개성적이며 향색이라고 하여 민족적 색채가 진했다. 하지만 병자호란 이후 소개된 청나라의 금석학과 고증학에 매진하던 추사는 한나라 때 비문글씨체의 법도에 근거한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신학문과 신 예술사조의 기수로서 콧대가 높았던 추사는 54세에 병조참판(오늘날의 법무부 장관)이 되며 정치적으로도 성공하는데 청나라 사신으로 북경에 가있는 동안 벌어진 정변으로 사약을 받게 될 처지에 몰리게 되나, 다행히 감형되어 제주 귀양길에 오른다. 이 귀양길에서 완도로 가는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나게 되는데 죄인으로 몰려 귀양 가는 처지에도 그 기개가 죽지 않았던지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의 얘기를 무시할 수 없어서 당시 대흥사에서는 이광사의 글씨를 내리고 추사가 쓴 현판을 올렸다고 한다.
햇수로 9년간의 제주 유배생활 동안 추사는 부인이 죽고 자신도 쓸쓸하고 외로운 회갑을 맞게 된다. 한동안 찾아주던 제자들도 뜸할 때 변치 않고 책을 구해주던 이상적이라는 제자의 마음에 감동하여 '날이 차가운 후에 소나무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며 그 유명한 세한도를 그려준다. 얼마나 외롭고 자신을 찾지 않는 지인, 제자들이 서운했으면 그런 그림을 그렸을까 싶다. 제주에서 그는 한나라 비문체를 주장했던 것에서 나아가 자신만의 개성 있는 필체, 추사체를 완성하게 되니, 추사체의 팔 할은 그의 외로움이 만든 것임에 틀림없다.
대흥사 현판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추사는 63세가 되어 귀양이 풀려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잘못 보았다고 하며 자신의 글씨를 내리고 원교 이광사의 현판을 올리라고 요청하게 된다. 그리하여 대흥사에는 지금의 이광사 글씨 현판이 다시 걸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멋진 반전 스토리가 있을까. 대학자이고 명필로서의 자존심이 높았던 분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를 높이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며 9년간의 뼈 아픈 유배생활이 그의 생각과 예술관마저 바꿔놓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극히 인간적으로 외롭고 힘든 유배생활 같은 삶의 큰 결핍이 예술을 완성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를 훗날 조선 최고의 명필로 만들었으니 인생이 주는 아이러니이고, 예술의 길이 그만큼 멀고 험난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현판들을 찾아보았다. 대흥사는 마치 조선의 두 명필 원교와 추사의 대결 현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아뿔싸,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은 절집의 보수공사로 인해 비닐에 싸여 있었다. 녹우당 보수공사에 이어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난 셈이다. 다행히 무량수각 현판은 볼 수 있었다. 유교수님은 책에서 이광사의 글씨는 '획이 가늘고 빳빳하여 화강암의 골기를 느끼게 해 준다'라고 했으며 반면에 김정희의 글씨는 '획이 살찌고 윤기가 난다'라고 하면서 원교의 글씨는 손칼국수 맛에 추사의 글씨는 탕수육이나 난자완스 맛에 비교하였다. 나는 오늘 손칼국수는 제대로 못 먹고 탕수육만 먹고 가는 셈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추사는 바다를 건너간 후 남에게 구속받거나 본뜨는 일 없이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추사는 귀양살이 이후에 '기름기를 제거하고 자신의 기(氣)와 운(韻)을 세우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유교수님은 설명하고 있다.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추사가 추사한 거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진의 유배생활에서 학문적 업적을 집대성한 다산이나 귀양살이의 외로움을 딛고 새로운 예술세계를 개척한 추사, 두 분 모두 후대에 우리 모두가 기리며 받드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갇혀있는 '유배'가 주는 삶의 깨달음과 내려놓음이 그들을 오히려 '자유롭게' 만들었으리라.
절에는 연등이 걸려있고 4월의 신록과 어울리는 철쭉꽃이 삼층석탑 곁에 피어 있었다. 이제 대흥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초의선사와 일지암 그리고 차 문화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다. (대흥사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