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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 Jul 16. 2023

30년 후에 가 본 남도답사일번지 10

해남 대흥사 2

국토의 남단에 있는 지방 사찰인 대흥사가 유명해지게 된 것은 서산대사의 유언 때문이라고 한다. 서산대사는 입적하기 전에 제자 사명당과 처영스님에게 당신의 의발을 두륜산에 두라고 유언을 했다. 기이한 꽃과 색다른 풀이 항상 아름답고 옷과 먹을 것이 끊이지 않으며 모든 것이 잘 될 곳이고, 처영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이 모두 남쪽에 있다고 하며 두륜산을 선택한 것이다. 

  서산대사는 마지막 법어로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는 글을 남기고 입적하셨다고 한다. 이 법어에 나오는 '너'는 자연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모두 자연에서 나와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서산대사의 금란가사와 발우(승려들의 공양 그릇)는 그리하여 대흥사에 모시게 되었는데 이후 대흥사는 이름 그대로 크게 일어나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민간신앙으로서 불교가 중흥했던 추세에 맞춰 많은 절집이 세워졌는데 이중에 표충사가 있고 여기에 서산대사, 사명당, 처영스님 세 분의 영정을 모시게 된다. 그리고는 백 년이 지나 정조는 표충사에 직접 쓴 어필사액을 내려 해마나 예조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대응사 내 표충사와 어서각 (현판은 정조의 필체이다)

책에는 대흥사 경내가 아늑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지금은 대웅보전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라 제대로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책에 실린 사진에는 없는 절집들이 이후에 들어서 있는 것 같았다.

책에 실린 대흥사 대웅보전의 모습
보수 중인 대흥사 대웅보전

천불전에서 내려다보이는 침계루의 모습도 책에 실려 있는데 넓고 호방한 규모이지만 돌담과 당우가 적절히 배치되어 공간의 흐트러짐이 없다고 평하고 있다. 침계루는 이후에 공사를 한 듯 책에 실린 옛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천불전쪽에서 계곡 쪽으로 내려다보면 많은 절집의 기와지붕이 이마를 맞대고 있는데 신록이 얼룩덜룩 물들어 있는 두륜산의 경치와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대흥사 침계루 (두륜산의 신록과 어울어진 절집 지붕들의 곡선을 보라)
천불전과 천불전에서 내려다본 마당과 용화당(좌), 가허루(중), 봉향각(우)

유교수님이 이 아름다운 가람배치를 망쳤다며 책에서 목소리 높여 박정희 때의 서산대사 성역화 작업과 거대한(?) 유물관을 비판했다. 유물관은 미색 수성페인트 콘크리트 한옥이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대흥사 절집들의 몇 배 큰 건물이라 마치 '비구니 스님들이 도란도란 얘기하는 정겨운 풍경 속에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괴성의 남정네가 들어선 모습 같다'며 나무라셨다. 지금은 유물관은 보이지 않고 표충사 올라가는 길 오른편에 성보박물관이 있었다. 유물관이 성보박물관으로 바뀐 것인지 새로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교수님의 쓴소리를 들은 담당자들은 이를 개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대흥사 답사기는 차 이야기로 마무리할 것이다. 대흥사 입구 숲길을 걷다 보니 새로 지은 듯한 기와지붕의 작은 집이 보였고 창을 통해 몇 분이 분주히 일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가서 보니 스님들과 보살님들이 차를 덖고 계셨다. 약재, 곡식등을 타지 않을 정도로 볶아서 익히는 것을 덖는다고 한다. 보살님 한분께 여쭤보니 절에 쓰는 차를 만드는 곳이라고 했다. 초록의 찻잎들이 둥근 솥처럼 생긴 곳에서 덖어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덖어진 찻잎은 말려서 차가 된다. 역시 불가의 차 문화를 일으킨 초의선사로 유명한 절 답다고 생각했다. 

대흥사 가는 길에 있는 차 작업장 (절에서 쓰는 차를 스님들과 아주머니들이 덖고 있었다)

대흥사 경내를 둘러본 후 초의선사가 칩거하던 일지암으로 올랐다. 포장된 산길을 한참 올라가니 오른편에 일지암으로 오르는 길이 이어졌다. 마침 예초작업을 했는지 일지암 입구에는 풀냄새가 가득했다.

일지암 오르는 길

책에 실린 일지암의 모습은 초가지붕이었고 지금의 모습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다만, 책에는 소개되지 않은 절집들이 일지암과 이웃하고 있었다. 연못 위에 기둥을 세워 누각을 지은 자우홍련사와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대웅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지암은 차를 잘 아는 스님만을 주지로 임명한다고 책에 소개되어 있는데 현재의 주지스님을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그분도 차를 좋아하시고 잘 아시는 분일 것이다.

일지암의 예전 모습과 지금 모습
일지암 옆의 자우홍련 사(연못 위에 놓인 돌기둥 위에 지어져 아름답다)
일지암 경내 전경(오른쪽에 대웅전이 있고 왼쪽에 자우홍련사와 일지암의 초가지붕이 보인다)

책에 실린 사진 속 유교수님처럼 일지암 툇마루에 앉아 앞을 내다보았다. 두륜산의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일지암 초가만 있었을 터이니 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여기서 초의선사를 비롯한 스님들은 차를 마시고 참선을 했을 것이다. 나는 다만 잠깐 숨을 돌리고 경치를 눈에 담을 뿐이다. 

일지암에서 바라본 풍경

초의선사는 월출산,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등을 유람하며 선을 수행하였고 대흥사 조실(선원의 가장 웃어른을 말한다) 완호스님의 뒤를 이어받은 스님으로서 종교로서의 불교라는 굴레를 벗어나 학문으로서 선교(禪敎)를 연구하고 유학과 도교까지 지식을 넓힌 분이었다. 또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같은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였고 특히 맥이 끊어져 가던 차 문화를 일으킨 분이다. 

  

유교수님은 시, 차, 선을 하나의 경지로 통합하고 불교 음악인 범패, 원예와 장 담그기까지 관심을 두었던 초의선사의 사상을 '불가 나름의 실학정신'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 삶 속에 '있는 것' 속에서 생각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세가 초의선사를 차 문화의 대부가 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초의선사는 자신이 세상에 유명해지자 대흥사에서도 30분은 걸어 올라가야 하는 곳에 일지암을 짓고 이곳에서 두문불출하며 정진하였고 많은 제자 스님들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산속에 있는 이 일지암은 한마디로 속세에 휩쓸려 도를 깨닫고자 하는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초의선사의 의지를 나타내는 곳이었다.  현판에 걸린 이름 일지암(一枝庵)은 자신을 불교의 전통이라는 큰 나무의 한 가지로 표현했다고 생각했는데 안내판을 보니 중국의 시 쓰는 스님 한산의 시 가운데 '뱁새는 언제나 한마음이기 때문에 나무 끝 한 가지에 살아도 편안하다'에서 따와 지은 것이라고 한다. 다성으로 불리기도 하는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40여 년 간 머물며 <동다송>과 <다신전> 등 차에 관한 책을 쓰고 차문화를 일으켰다. 


초의스님은 당대의 학자, 시인 등과 넓게 교류했는데 가장 유명한 인연은 추사 김정희였다. 초의와 추사는 동갑이었다고 하는데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배웠고 초의가 보내주는 차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책에는 추사가 초의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하는 편지를 자주 보냈고 그중 애절하다고 표현한 사연이 소개되어 있는데 실은 재미있는 사연이다. 보고 싶지도 않으니 편지도 필요 없고 차만 보내라는 내용은 절친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장난기 많은 문장들이다. 


'편지를 보냈는데 한 번도 답은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산중엔 반드시 바쁜 일은 없을 줄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나 같은 세속 사람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나처럼 간절한 처지도 외면하는 것입니까...

나는 스님을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와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필요 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는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 거요.'


추사는 초의가 보내준 차를 마시며 책에서 유교수님이 추사의 예술 중 백미로 꼽은 명작 글씨 <명선(茗禪)>을 쓴다. 이 작품에 대해 유교수님은 '웅혼한 힘과 엄정한 구성을 유지하면서도 필획의 변화가 미묘하게 살아 움직이는, 추사 예서체의 진수가 들어있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작은 글씨는 초의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중국의 유명한 차인 몽정과 노아보다 덜하지 않다. 이 글씨를 써서 보답한다는 내용이니, 이 명작은 책에 쓰여있듯이 초의가 보내준 차와 두 사람의 우정이 만든 것이다. 

앞서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추사는 외롭고 힘든 제주도 유배라는 인생의 고난 속에서 예술혼을 꽃피워 추사체라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가 유배생활을 견디고 예술을 완성한 데에 초의선사와의 우정과 그가 보내준 차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자 이제 30년 후에 가 본 남도답사일번지 답사가 끝이 났다. 

책에 소개된 해남 미황사와 땅끝마을은 날이 저물어 못 들어가 본 강진 영랑생가와 시문학파 문학관, 공사 중이라 못 본 녹우당과 고산윤선도박물관, 대흥사 대웅보전과 함께 따로 날을 잡아서 가보리라 다짐했다.  


제일 처음에 얘기했듯이 나의 답사는 철저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의 남도답사일번지 편에 의거했다. 그러면서 30년이 지난 유적과 유물들의 지금 모습 30년 전과 비교하여 보여준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글들이 이 남도답사일번지를 지금도 찾는 많은 이들에게 한가닥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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