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문뜩 쓰고 싶어 졌다.
이민 성공 신화는 모두들 여기저기서 많이 봤을 테니, 나같이 평범하지만 조금은 특별한
'그랬었지, 라떼는말야..' 라면서 들려줄 수 있는 이민자 이야기들을 조금씩 나눠보면 어떨까?
6살 때 브라질로 이민을 간 1.5세의 교포가 이제 어느덧 30대가 되었다.
40대의 부모님은 60대가 되셨으며, 우리는 25년 차 이민자 가족으로 살고 있다.
6살의 이민가정의 아이는 포르투갈어를 전혀 못해 부모님의 특별 조치로 매일 무조건 알파벳 A부터 Z까지 반복해서 20번을 쓰고 나서야 놀러 나갈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놀러 나가기 위한 절차정도로 생각했던 나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알파벳을 쓰고 읽기를 반복했다. 그러니 한국 유치원에서 '가나다라'를 갓 띄고 온 아이가 '알파벳'을 외우기까지, 이는 수백 번 혹은 수천번의 반복된 연습으로 인한 결과물이었다.
몇 개월이 지나 1년을 꿇어 들어간 유치원에선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선생님은 소변이 마려워 다리를 배배 꼬는 아이에게 "선생님, 저 화장실 다녀와도 돼요?"라는 문장을 외우도록 했고 매번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이 문장을 머릿속에서 되뇌었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
"Professora, posso ir ao banheiro?"
(선생님, 화장실 가도 돼요?)
내가 가장 처음 완벽히 외운 문장이었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까지만 있는 작은 학교에 다니다가 중학교 때 같은 동내에 있는 더 큰 학교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초-중학교를 같이 다닌 브라질 친구가 어느 날 나에게 말했다.
"너 옛날엔 포르투갈어 진짜 못했었는데 정말 많이 늘었구나!"
이건 분명 칭찬인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빨개지기까지 하며 난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내 모국어가 포르투갈어라고 착각하고 살았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게 나의 첫 정체성의 혼란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참 쉽게 언어를 습득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놀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되는 그런 것. 나 또한 어려서부터 이민을 갔으니 자연스럽게 성장해가며 언어를 익혔는데 그게 마치 원래 늘 갖고 있던것 처럼 착각 하고 살고 있던것이다.
나는 분명 그곳에서 외국인이었고, 나의 모국어는 한국어였다. 당시에 잘 쓸줄도 모르고 익숙하지 않아 천천히 읽히는 한국어가 나의 모국어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 했지만.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 여기서 끝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나는 20살 때 또다시 파라과이로 재이민을 떠나왔다.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배우게 된 스페인어는 몸에 익히는 게 정말 힘들었고, 비슷하면서도 다른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 사이의 '포르투뇰'을 입에 달고 살았다.
파라과이에 도착하고 그 이트날 핸드폰 개통을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통신사에서 확인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두려움에... 서툰 스페인어로 "저...전 스페인어 못해요!"라며 바로 끊어버렸다. 집 옆 작은 슈퍼에 가서는 칫솔을 달라고 했더니 빗자루를 가져다주길래 갸우뚱했는데, 알고 보니 포르투갈어로 칫솔인 '에스코바'가 스페인어로는 빗자루였던 것이다. 슈퍼 주인 아줌마와 둘이서 한참을 웃었고 그 후로 나는 그곳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지금은 통번역가로 일을 할 만큼 많이 늘었지만, 10년 전엔 또다시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게 나에겐 참 버거웠다.
6개월 전부터 전화 영어 과외를 시작했는데, 현지에서 배우지 않아서인지 역시 통 늘지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한국어와 포르투갈어 그리고 노력 끝에 얻은 스페인어, 3가지의 언어를 구사한다. 내가 이민과 재이민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언어다. 언어는 나에게 있어서 어디서든 손과 발이 되어주고 한국에서 유학할 때 나에게 연명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벌어주기도 했고 지금까지도 내게 남은 특별한 재산이다.
3개 국어를 뜻하는 Trilingüe,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이민 이야기의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