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세, 임신출산고민
각 번호는 2025 1/4분기 때 던진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 생각의 변화 혹은 추가된 내용이다.
공포감 때문일까 좀처럼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지 않게 되어 가볍게 임산부의 임신만화를 읽어보았다. 그리고 알게 된 임산부의 굴욕 3가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바로 내진검사, 음모제거, 그리고 뭐드라 아! 관장까지..
내진은 실제로 질내에 손가락을 삽입하여 촉진한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문자로 다시금 하나하나 눈에 밟혀 읽혀지는 것이 벌써부터 거부감이 몰려온다. 어후..
확실히 피부조직의 회복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보며, 35세 이후로는 노산이라고 정의하게 되는 이유를 몸소 느끼고 있다. 37세 이상에는 나이를 낳지 말아야겠다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 자녀를 원한다면이라는 전제로 생각이 불임까지 이어졌다. 불임치료에 대한 비용을 검색해 보니, 생각보다 비싼 금액에 결정을 서둘러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압박감이 들지만, 어쩌겠는가.
결국 아이를 낳는 것은 가치와 실용성 중 양자택일의 문제로 와닿고,
가치만을 쫓기에는 한국 사회가 녹록하지 않은 현실이다.
합리적인 선택을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선택 너머, 가치 지향적인 삶 혹은 이상적인 삶은 출산을 한 삶일 것이다. 가치추구형 삶을 살기 위해 아이를 택한다고 하지만, 그 후의 삶은 지극히도 합리주의적인 현실을 살아가게 된다. 둘 중 한 사람이 직장을 포기해야 할 때, 아무래도 조금 더 보수가 적은 여성이 직장을 포기하게 되는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합리적이다는 것은 때때로 폭력적이다. 그렇다면, 여성 개인의 삶에서 합리성은 아이를 출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출산하지 않은 여성을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는 가. 불공평하다.
요즘 마음에 와닿은 쇼츠가 있다. 비비라는 여성이 출산하고 싶은 마음을 표하면서, 자녀는 내가 한없이 사랑을 줄 수 있는 대상으로 그런 대상을 너무도 기다린다고 했다. 아이들은 나도 모르는 내 냄새를 알고, 엄마냄새라고 한다. 그리고 한 없는 사랑을 준다. 생각해 본다. 엄마와 함께 자는 것은 싫지만 엄마의 존재 그 자체가 주는 심리적인 울타리가 나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큰 힘이 된다. 엄마의 냄새를 사랑한다. 엄마를 때때로 포근히 안으면 가슴 깊숙 이서 올라오는 뭉클한 이 감정이 좋다. 늙는다는 것은 엄마의 존재가 사라지는 하루하루가 가까이 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반대로 나 또한 자녀를 출산한다면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키우는 동안에는 내 모든 것을 주어도 부족함에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누군가의 마음의 울타리가 되어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인가. 이것을 값어치로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을 합리주의로 말할 수 있을까?
인생의 성과가, 일뿐일까? 싶지만. 그 성과 중 하나에 아이를 넣을 수 있을까. 인생의 각 영역이 있다면, 나름 가정에서의 아이는 또 다른 재미가 성과이자 미션일 것이다. 인생의 노잼시기라는 말이 있는데, 아마 아이가 있다면 이런 노잼시기라는 말이 무섭게 시간이 지나가지 않을까 싶다.
그러기에 '자녀를 낳고 싶은 가'에 대한 질문에 있어 3/4분기까지 그 의견이 좁혀지지 않고 양립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 결국은 어떤 나만의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지금도 그리 씀씀이가 크지 않은 편이라, 더 각박해진다면 그에 대한 생각은 꽤나 길어질 것이다. 그래, 나만의 어떤 경제적인 기준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그 기준은 결국은 최소한의 금전적인 마지노선 같은 것일 것이고, 이것에 대한 생각은 결국 꽤나 긴 가정경제계획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나만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을 것 같다.
- 다음 분기에는 내가 생각하는 경제적인 마지노선에 대한 생각을 해보아야겠다.
디스토피아에 아이를 낳는 것은 과연 좋은 선택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한민국의 미래는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인재가 자원인 나라에서는 초저출산에 접어든 지 오래이다. 정부가 이 위험을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였고, 또 앞으로 남은 과제가 잘 풀어질지, 우리도 일본처럼 잃어버린 30년을 보내게 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은 30년 후쯤에는 젊은 인력을 받아들이기 위해, 더 많은 외국인을 수용하게 될 것이며, ai와 맞서는 사회, 그리고 기후환경을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자라는 아이가 될 것이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약하게나마 환경오염을 덜 하는 것인데 이 작은 실천조차도 사실 작지만은 많다. 시도를 몇 번 해보았지만 경기도에서 출퇴근을 하며 식사하나 제대로 못하는 내가 그 시간을 아끼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상황에서, 환경을 위해 시간을 쓴다는 것은 시간을 누리는 행동이다. 소극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언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면, 시간을 쓰지 않는 대신 친환경제품이라던가 이런 소비제품을 더 구매하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일 것이다. 그리고 ai는 나도 이제 맞이하는 세대라서 아직 어떠한 대책을 구하지 못한 채 이 문제에 대해서 촉각을 세우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낳는 다면,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아이가 되어야지 다음 세대에서는 살아남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기에는 스스로도 영어를 못한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렇기에 나는 내 자녀에게 무시를 당할 수 있다.
어릴 적 나도, 나의 부모모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 한참 자아가 비대해질 때는 엄마가 뭘 더 나보다 아냐는 식을 대들기도 했고, 핑계로 과연 그것이 나뿐만이었을 까 싶다. 나는 나의 자녀보다 더 지식이 많아질 수 없다. 그런 아이에게 어느 순간 무시를 당할 수 있다. 또한 나의 최선이 자녀의 욕망에 못 미쳐서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부모가 된다는 것은 한 없이 작아지는 것 같다. 무시당할 수도,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적인 세상에 나는 아이를 낳고 싶은가? 이 세계에 나의 동지는 있는가?
나 하나 건사하기 힘든 데, 아이라니. 생각만 하니 이기적 이게도 난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단번에 든다. 실질적인 도움뿐일까.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로 든든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물론, 두 분이 건강하다는 전체하에 일이겠지만 말이다. 일단 부모의 조력을 받기 위해서는 부모의 근처에 있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여차피 아이를 제대로 잘 보지 못하는 남편이라면, 엄마 곁에서 아이와 함께 살피며 주말부부로 남편이 올라오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