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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OT May 22. 2023

지난 일기를 읽고 이번에는 울음이 나지 않았다.

제주도 한 달 살기 D+26 / 부끄러울 자유.

이제는 제법 여행과 일상에서의 가운데서 일상으로의 비율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연인이 오늘 아침 일찍 다시 육지로 떠났다. 나는 뜬 눈으로 엘리베이터로 가서 보내곤, 다시 잠을 청했다. 요즘 부쩍이나 잠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 본가로 가게 되면 다시 일어나는 루틴을 짜야지라고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저녁 이 시간에 일기를 쓰는 것도 좋은데 그러면 나는 저녁형 인간인 걸까? 이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일단 서울 본가에서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평온하게 살기 위해서는 집에 있다고 축 쳐지거나 나태로운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늦게 일어나는 것은 엄마아빠에게는 나태로운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7시 반에는 일어나서 9시에는 나의 일을 하곤 했다. 9시에 일을 하는 것은 오랜 학교생활과 회사생활의 잔해라고 할까? 여하튼 오늘은 8시 반쯤은 기상하여 천천히 커피를 내리고 세탁물을 돌리고, 밥을 올려놓고, 노트북을 켜본다. 어제 의뢰 보냈던 작업물이 왔다. 그 의뢰물을 살펴본다. 이 순간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쓴 글들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부끄러운 나의 글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듣는 귀가 오직 나뿐이라는 것이 안심이 된다. 집에서는 내가 쓴 일기를 소리 내어 읽는 것은 약간의 긴장감이 도는 일이다. 가족이어도 일기가 들리기는 것은 싫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작은 도전들을 많이 하고 작은 실패들을 빨리해야지 성공을 한다고 하는데, 그 작은 도전들을 하는 과정에는 어쩌면 조그마하지만 여러 번의 부끄러움이 있을 수 있다. 실패의 부끄러움이 있을 수도 있고, 하는 과정에서의 부끄러움이 있을 수도 있다. 이 부끄러운 과정을 하는데, 나만의 공간이 있다면 한 없이 부끄러운 과정을 편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한 것일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를 내어 읽는 나의 일기가 부끄럽지 않다. 두 귀로 나의 글을 듣고 손으로 다시 고쳐보는 이 순간 나는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즐겁다.


오랜만에 집에서 밥을 짓고 육개장을 먹고 비교적 가까운 30-50분 거리의 한라수목원을 방문했다. 어제 비밀의 숲을 갔다 와서 그런가  한라수목원에서의  감흥이 덜하다. 물론, 이런 수목원이 우리 집 근처에 있다면 자주 올 것 같다. 확실히 수목원 구성원이 우리 동네에 있는 수목원에 있는 분들처럼 동네 아저씨, 아줌마와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온 부부가 가장 많았다. 어제와는 사뭇 다르다.


온 김에 이런저런 식물원을 가보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식물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 내가 아니다. 그런데 가까운 관광지라고 하여서 온 내가 나의 여행스타일을 아직 못 찾은 것 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는 오전에 머리 쓰는 일을 하고 2시쯤 나온 산책은 좋다. 바람이 분다. 머리가 휘날리고 수많개의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바람 한 번에 많은 소리들이 화답해 주어서, 바람은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평소에는 하지 않을 생각 하라고 산책을 하는 거겠지 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다니고 퇴사하면 상처받았던 마음이 대부분 회복되었음을 직감적으로 와닿았다. 오전에 내가 썼던 일기들을 보면서 울음이 나지 않았다. 전에는 그 일기를 쓰면서 울었고, 일기를 다듬으면서 울었다. 그 일기는 눈물로 지어진 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기는 밝지 못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번에 나는 그 글들을 내 입으로 소리 내어 읽고 두 귀로 판단하여 손으로 수정하였다. 그런데, 슬픔이 전처럼 흘러나오지 않았다. 내 마음에 제주도라는 기쁨을 한가득 넣어서, 이제는 슬픔이라는 마음이 조금은 희석이 된 것 같다.


'이제는 좋은 카페도, 관광지도 가기가 귀찮아지네. 집에서 작업이나 하고 싶어 진다. '라는 마음을 직시했을 때는 역시 여행이 매일이 되는 것은 조금 다르네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만큼 내 마음에 제주도에서 많은 기쁨이 채워진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직접 갈아서 내리는 커피로 시작하는 아침. 카페에서 커피가 아니더라도 시그니처 음식을 도전하는 재미. 부끄러운 나의 일기를 소리 내어 읽는 자유. 유튜브 목소리를 평소 내 목소리크기로 녹음하는 자유. 한달살이 초반까지만 해도 이곳을 못 가면 어쩌나, 저곳을 못 가면 어쩌나 이런 아쉬움들이 있었다. 그런 의무감 같은 감정들도 어느덧 희석이 되고 이제는 못 가면 못 가는 거지라는 마음이 생겼다. 제주도에서 자유감을 느낀 것이 가장 큰 보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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