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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당신의 친구가 아닙니다.

절교할 용기

by SHOOT

연이은 친구의 일방적인 메시지에 몇 번의 성의 없는 반응에 이어, 이제는 무반응으로 이어가는 나. 친구라고 생각하는 기간 동안 충분히도 계산적이기에 겨우 연명해 왔던 아슬아슬한 우리의 관계를 이번에는 소심하고 유약한 나이기지만 나의 편의 데로 이별을 고하고자 한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친구가 아니다. 당신은 나의 결혼식에 참여했고,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주었을 때도 있었고, 여행을 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오랜 시간 함께했다는 관계에 점점 귀속되듯 의미를 부여하며 관계를 이어갔었다. 만나 즐거운 것이 그 존재이기 때문인지 단순히 이야기를 함으로써 얻는 해소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계산이 빠른 당신은 관계에 있어 손해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때때로 더 확장되어 타인을 상황에 따라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느껴지게 했었다. 아니, 어쩌면 진실과는 다르게 그렇게 와닿게 전달되는 것 일 수도 있다. 잠시의 손해는 큰 이득을 위한 투자처럼 느껴지는 어떤 날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우리에게는 크게 3번의 위기가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대학생시절, 그리고 지금이다. 그런데 결국 그 모든 순간들은 '돈'과 관련된 것들이었으며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정설처럼 와닿기도 하는 날이다.



3번의 손절기회

사람은 바뀌지않는다.

다른 친구가 준 비싼 선물을 나에게 자랑했던 너는, 나의 선물을 초라하게 했었다. 한 푼 아쉬운 아이 엄마일까, 무료로 생긴 기저귀에 당신부터 생각나서, 챙겨주었을 때 너는 우리 아이는 이런 기저귀는 안 쓴다고 했었다. 너는 그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번 너의 생일, 넌 너의 생일 때. 선물로 얼마까지 가능하냐고 물어보곤 했다. 원하는 것을 주고 싶다는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가격선을 확인하고 물건을 이야기했었다.합리적인 것 같으면서도 가격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순서가 이상하다고 느꼈었다.


진실로 친구를 생각한다면 이러이러한 것이 가지고 싶다고 선택지를 알려주면 선물 주는 사람이 본인의 사정에 맞춰 주면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생일선물이 겹치는 것이 싫은 것이 더 우선순위에 있던 거였겠지. 사람을 기회라고 생각한다는 게 이런 맥락에서 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집들이선물과 생일선물을 함께 해서 줄 수 있냐고 물었었지. 10~15만 원이라 말한 가격이 네가 준 축의금 33만 3천3백3십3원에 비해 적어 아쉬웠던 것일까. 의사전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며칠이 지난 뒤 카톡으로 또 얼마를 생각하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이번에도 동일한 가격 10~15만원 생각한다고 전달했다.


'가지고 싶었던 17만 원 청소기는 일단 pass고'라는 말에 엄청난 피로감을 느꼈어. 그냥 난 17만 원 청소기를 암묵적으로 사줄사람이었나봐. 결국, 나는 사주기로 하고 그 청소기는 달러가 치솟아 약 22만 원짜리를 선물을 주게 되었지. 가격이 비싸진 사실을 알리자 너는 저렴한 버전도 괜찮다고 했지만 이미 빈정이 상했고, 난 인지 시키고 싶었어



'젊은 시절'이 없던 너와 나는

서로가 버팀묵이었지

아이를 낳고 너는 갑자기 4~5년 일방적으로 연락이 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몇 년을 잊고 살았던 어느 날, 불쑥 연락이 와서 지난 사정을 말했었다.


'젊은 시절'을 잃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큰 것이 우리를 이어주었다. 어린 나이에 출산을 하고 결국에는 이혼을 하게 된 너와 여러 번의 직무 전환으로 취업준비만으로도 '젊은 시절'의 멋진 추억이 없는 나는 동질감으로 뒤늦게 이러저러한 것들을 함께 쌓으며 지냈다.


그렇게 함께 새로운 경험을 쌓을 때마다 스치듯이 보이는 너의 계산적인 태도에 얼마나 곤궁하게 지냈으면 저러는 것일까 싶다가도, 한 푼의 손해도 그리고 한 푼의 베풂도 상대방이 마음으로 느끼기 전에 꼭 어필을 해 머릿속에 인지 시키려는 행동 패턴에 몇 번씩이나 너란 사람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었다. 단점이자 장점처럼 너는 그 모습을 '똑 부러진', '현명한' 사람으로 스스로 포장을 했었던 것 같다. 현실적인 조언은 나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때때로 행동으로 이어가지 못하는 소극적인 나이기에 당신의 대범한 행동에 가끔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며, 어떤 면에서는 배워야 하지 않나라고도 생각했었다.


무서움이 느껴진다면,

쎄함이 느껴진다면,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즐겨보는 유튜브가 바뀌면서 알게 된 사실이 너의 존재에 대해 '무서움'으로 어느 날 확 와닿았어. 무서움. 친구에게 무서움을 느낀다면, 그것이 친구일 수 있을까? 내가 알게 된 사실은 바로, '남편에게 유책사유가 있다면, 양육권을 가져오는 것은 쉽다. 나이가 어릴수록, 엄마가 양육권을 가져오기 유리하다'는 사실이다. 이혼을 하고 온 너는 나에게 한 말은 ' 남편인 군생활 중에 탈영을 하고 도박을 하기 위해 금은방을 털었다.' , '아이는 시댁에서 가져갔다.'였다.


당신의 말데로라면, 이혼의 유책사유가 남편에게 있다면 아이는 충분히 데려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아이를 포기한 것이다. 엄마는 엄마라는 이유로 아이를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일까? 아이를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지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떠나 인간적으로 본인스스로 살 여력이 안되는데 아이를 포기하는 선택은 그렇게도 이기적인 것일까?라는 질문에 사실, 난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움으로 와닿는 이유는, 단 한 번도 아이를 그리워한다고 느껴진 적이 없었다.


어느 때이고 너의 아이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그 주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너는 야무진 성격처럼 명확하게 나에게 의사전달을 했었다. 그래서 나 또한 더 이상 그 주제에 대해 굳이 먼저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내가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먼저 네가 이야기를 꺼내는 날이 그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너를 더욱 비정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한 번쯤은 그립다, 보고 싶다 그런 말은 아니더라도, 아이에 대한 흔적을 보인 적이 없었어. 오히려 그 반대였지. 양육권은 주지 않으면 명단이 올라가는 사이트가 있다는 말을 흘리듯이 한 적이 있었고, 양육권이 나가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연말정산과는 별개로 종합신고를 따로 한다는 말을 했었다. 그래, 너는 대외적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는 것 같았다. 그래 그야, 사회적으로 이혼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봤자 좋은 것은 없으니깐.



나에게 뜯어먹을 게 뭐있다고

이 모든 행동이, 너를 무섭게 했다. 자식을 버린 사람이 친구를 못 버릴 이유가 있을까. 나에게 뜯어 먹을 것이 없는데, 왜이럴까 했는데.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을려나보지라는 말을 들었다. 나한테 콩고물이 어딧어?


이렇게 한푼식 약간 기분이 상해도 선물을 챙겨주고, 집순이가 나와 시간을 할애하여 만나는 것도 에너지를 쓰는 것도 콩고물이라는 말에 정신이 차려졌다.


너는 이미 나에게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었어. 아직도 너의 카톡이 나에게 쌓였지만, 이제는 답하기가 싫어 이제는 안녕할 때가 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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