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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평근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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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 Sep 21. 2024

수평근 1

당신만을 위한 힘줄을 키우기를


  해안선을 따라 소나무 군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나무들은 솔밭을 흔드는 바람에 단단하게 결계를 친다. 소금기 가득한 지표면 위로 굵고 가느다란 뿌리가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억척스레 모래땅을 움켜쥐고 있는 수평근의 힘줄이 햇살 아래서 선명하게 불거진다.


  수평근 水平根은 지면과 평평하게 자라는 뿌리를 의미한다. 척박한 땅이나 토심이 얕은 곳에서 나무는 원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 대신, 수평근이 지표에서 자라며 수분과 양분을 흡수한다. 주근 主根이 해야 할 역할을 대신하거나 나누는 것이다.


  동생에게 엄마의 간병을 맡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도로는 동맥경화 걸린 혈관처럼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려운 수술은 아니었지만 지난 며칠의 병원 생활은 태풍 속을 지나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회복 기간 중 갑자기 들이닥친 섬망으로 가족들을 기함시키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어젯밤엔 정상으로 돌아왔다. 꽉 막힌 길이 시원스레 뚫리기를 막연히 기다리느니 걱정 탓에 피곤해진 머리를 파도에 씻어낼 요량으로 차를 돌렸다. 정신없는 롤러코스터를 겨우 벗어난 나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바다는 푸르러 비바람이 지나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평소 약한 다리로 억척스럽게 살아서 그랬는지 엄마는 무릎이 빨리 상했다. 절룩거리며 통증을 참다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진료를 받았다. 수술이 끝나고 피주머니를 단 채 병실로 들어서던 당신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왜소했다. 마취 기운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 까무룩 잠든 엄마에게 이불을 덮어주다 문득 시선이 환자복 아래 발목으로 옮겨갔다. 흉터는 예전에 비해 많이 흐려져 있었다. 나는 피부가 엉겨 붙어 일그러진 발목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가까이 다가가 소나무를 쓰다듬어 본다. 바닷가의 거친 환경에 적응하며 튼실하게 몸집을 키우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거북의 등껍질처럼 갈라진 틈 사이로 곡진한 세월이 새겨져 있다. 소금기 가득한 바람과 강한 자외선에 그을린 듯 수피는 까맣다. 손이 닿으면 찌를 듯 억센 잎과 지면으로 끈질기게 핏줄을 뻗어가는 뿌리들에서 살아온 시간의 내력을 읽는다. 이토록 강인한 생명력을 얻은 것은 모진 수난들을 이겨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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