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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평근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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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 Sep 18. 2024

달팽이

당신의 어깨에 매달린 짐을

  아침 6시, 밤새 뒤척이던 남편이 침대 끝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본다. 그의 시선이 낯설다. 눈길 닿는 곳마다 가늘게 실금이 간다. 자는 척 몸을 뒤척여 돌아눕는다. 등 돌린 어깨 뒤로 눈빛이 잠시 머무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선다. 닫히는 문에서 차가운 바람이 인다.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제저녁 거실 가득 펼쳐두었던 물건들이 배낭 속으로 자리를 찾아들어가는 모양이다. 그의 생각도 제자리를 찾는 중일까? 평온을 가장한 마음에서 끊임없이 소요가 인다. 눈을 감은 채 일어나야 할지 자는 척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진다. 그래도 배웅은 해야 할 것 같아 무거운 마음을 일으킨다.


  “뭐 좀 챙겨줘? 아침 먹을래?”

  “더 자, 가면서 김밥 사서 먹으면 돼.”

  “커피라도 내려줄까?”


  천정에서부터 바닥까지 집안 가득한 어색함을 쫓아내려 요란하게 주방 창을 연다. 한줄기 바람이 얼굴에 닿는다. 침묵. 무언가 생각난 듯 공기를 폐부 가득 채우고 그를 바라본다. 단단한 등이 벽처럼 보인다. 할 말은 어느새 입구가 열린 풍선처럼 사라지고 만다.


  무안한 듯 커피 분쇄기에 원두를 넣어 요란스레 손잡이를 돌린다. 어색한 침묵 사이를 메우는 달그락 소리, 커피 향기. 오늘 아침 분위기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 좀 어때.


  거실에선 남편이 마지막 짐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다. 돌아오면 다시 풀 것을 무어 저렇게 많은 것을 지고 가는 것일까? 주말 동안 단 하루 산에서 자는 것일 뿐인데 가지고 가야 하는 장비가 산더미다. 텐트, 침낭, 버너, 코펠, 그늘막, 램프, 매트….


  태풍 전의 고요처럼 낮게 가라앉은 정적 사이로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만들어내는 소음만 간간이 흐른다.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현관 콘솔에 올려두고 모른 척 신문을 들춘다. 준비를 마친 남편이 배낭을 어깨에 단단하게 메고 거울을 한번 보더니 현관을 나선다. 마지못해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며 나가는 사람보다 콘솔에 남겨진 텀블러에 먼저 눈이 간다.


  ‘끝내 가지고 가지 않았구나.’

  커피가 아니라 마음이 거부당한 것만 같다. 정적.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식도를 타고 쌉싸름한 전율이 흐른다. 지난밤, 남편이 ‘내 인생은?’ 하고 말했다. 그의 인생은... 그의 인생은... 이 말은 원래 내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넝쿨처럼 줄줄이 딸린 시댁 식구들, 별난 남편, 기질적으로 까탈스러운 딸들. 지뢰밭처럼 예기치 못한 곳에서 터지는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 사이, 혼자만 빛을 잃고 도태되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점점 작아져서 없어질 것 같은 날엔 어김없이 남편에게 히스테리를 부렸다. ‘내 인생은? 나는 어디에 있냐?’라고 소릴 질러댔다. 다른 사람들은 잘 살아가고 있는데 나만 힘든 것 같아서, 잘게 부서져 흔적조차 없어질까 봐 두려웠다.


  남편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 혈기 왕성한 사내로, 집안의 가장으로 거침없이 멋지게 자신의 삶을 가꾸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위기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그의 여유가 부러웠다. 혼자만 종종거리며 애쓰는 것 같아 더 마음이 상했다. 어제저녁 그의 말은 송곳처럼 명치에 와서 부딪혔다. ‘저이도 나만큼 힘들었구나.’하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갑자기 어색해진 우리는 저녁 내내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미안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하는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손에 쥔 커피 잔이 뿌옇게 흐려진다. 눈을 한번 깜빡거리고는 식탁에서 일어나 베란다 창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봄 햇살은 금빛 가루를 뿌리는데 마당으로 걸어 나가는 남편은 검은색의 조그마한 점처럼 보인다. 구부정하게 숙인 어깨 위에 웅크린 사내가 하나 올라탄 것 같다. 밖으로 나서는 그의 모습에서 불현듯 며칠 전 화단에 풀어준 달팽이가 오버랩된다.


  시장에서 달팽이 한 마리가 따라왔다. 푸성귀를 손질하다 발견한 녀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제 몸보다 큰, 무겁고 버거운 집을 지고 어디로 가는 길이었을까. 느릿느릿한 움직임이 안쓰러워 파릇하게 물이 오른 화단에 풀어주었다. 녀석은 천형 같은 제집을 등에 업고 지금도 열심히 기어가고 있을 것이다.


  남편이 멘 80리터의 배낭이 흡사 달팽이집 같다. 저 안에 자신이 평생 짊어져야 할 짐을 다 넣은 것인지도 모른다. 부피가 크고 무거운 텐트라는 이름의 시댁 식구들, 그릇이지만 채워주어야 소리가 나지 않는 코펠이라는 이름의 아내, 밝게 빛나고 사랑스럽지만 가까이 가면 상처를 입히기도 하는 불꽃 램프 같은 딸들. 그에게 지워진 것이 참 많았구나. 어쩌면 즐거움을 위해 등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짐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산을 오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근육이 단단하게 잡혀 허벅지가 터질 것 같던 바짓가랑이가 헐렁해 보인다. 살아간다는 것이, 살아낸다는 것이 시련을 통해 맷집이 잡힐 법도 한데, 힘들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짐 하나 없이 매끄러운 민달팽이인 나도 매일 이렇게 비명을 지르는데 제 몸보다 큰 집을 진 남편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결혼할 때는 둘 다 등이 매끈하고 날렵하게 생긴 민달팽이였다. 어느새 삶의 더께가 쌓여 저이는 제 몸보다 큰 짐을 혼자서 지고 있었구나.


  햇살이 달팽이를 덮는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면 눈부심 속으로 그가 사라질 것 같아 갑자기 겁이 난다. 나는 베란다 창에 매달려 큰 소리로 남편을 부른다.


  “여보!”

  달팽이가 깜짝 놀라 위를 올려다본다.

  “커피 가지고 가요.”


  콘솔 위에 있던 텀블러를 들고 현관을 뛰어나가 엘리베이터를 누른다. 민달팽이는 문득 ‘남편의 어깨에 매달려 있기는 하지만 너무 무거운 짐이 되지는 말아야지’하고 생각한다. 그의 부담을 덜어서 내가 함께 지더라도 덜어낸 무게만큼의 책임감이 또 배낭에 실릴 것이다. 그러니 내가 또 다른 짐이 되지는 말아야지.


  아까시향을 안고 봄바람이 불어온다. 생기 가득한 햇살이 부드럽게 몸을 감싼다. 아찔함에 잠시 눈을 감는 사이, 갑자기 겨드랑이가 가려운 것 같다. 내게도 보이지 않는 집이 생기려나 보다. 부풀어 오른 이팝나무가 팡팡 봄을 터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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