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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평근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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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 Sep 04. 2024

상아실패 1

오래된 실패의 안부를 확인하다

  바람의 감촉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부드럽다. 나른한 봄기운에 얇은 재킷을 꺼냈더니 단추가 달랑거린다. 단단하게 새로 고쳐달고 나갈 심산으로 반짇고리 뚜껑을 열면서 오래된 실패의 안부를 확인한다.


  요즘은 반짇고리를 꺼내는 경우가 드물다. 아이들은 자라서 떠났고, 이불을 깁는 것처럼 매번 신경 써서 챙겨야 하는 일도 오래전 졸업했다. 두어 달에 한 번쯤 꺼내 사용하지만 열 때마다 꼭 확인해 보는 것이 상아실패다.


  벌꿀색 실패는 어머니의 친정 어머님이 사용하던 물건이다. 본인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끼던 것이 지금은 자연스레 내 차지가 되었다. 나비모양의 얇고 평평한 몸체에 아직 사용하지 않은 무명실이 두껍게 감겨있다. 당신이 정정하시던 때엔 철철이 이불 홑청을 삶아 풀을 먹여 정성 들여 기웠다. 그때는 봄가을 외에도 제법 여러 용도로 바쁘게 돌돌돌 실을 풀어냈다.


  오늘처럼 봄볕이 좋은 날이면 어머니는 겨우내 덮었던 이불을 걷어냈다. 햇살 쏟아지는 거실 바닥에서 쪽가위로 삶의 각질이 묻은 홀침실을 똑똑 잘라낸 후 세탁기에 돌렸다. “예전에는 우물가에서 방망이로 두드려 빨았다.”는 말을 꼭 곁들이면서. 세탁을 마친 홑청은 묽게 쑨 밀가루 풀에 담근 다음, 꼭 짜서 말렸다. 고부간에 마주 앉아 두 개씩의 모서리를 잡고 밀고 당기며 반듯하게 널 때면 간밤의 근심 몇 개도 함께 주름을 폈다. 


  바짝 마른 홑청을 바닥에 펼친 후, 지나는 바람에 맑게 목욕한 솜을 올리고는 네 귀퉁이 각이 잘 맞게 꿰맸다. 이때 도톰한 무명실이 감긴 실패가 등장했다. 길쭉한 이불 바늘에 최대한 길게 실을 꿰고는 한 땀 한 땀 홀쳐나갔다. 노련한 어머니의 가지런한 바늘땀과 초보인 나의 삐뚤빼뚤한 바늘땀이 서로 마주 보고 걸었다.


  어머니는 부농의 딸로 태어나 사업가의 아내로 평생을 살았다. 젊었을 때 의류 카탈로그 모델을 했을 만큼 고운 얼굴이라 연배의 어른들에서 보이는 궁핍함이 당신에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업이라는 것이 그렇듯 크게 성공하기도 했지만, 번 돈을 다 잃고도 모자라 가재도구에까지 경매딱지가 붙기도 했다. 어떤 때는 야반도주로 주거지를 옮겨야 하는 일도 있었다. 아버님의 뇌출혈과 돌아가실 때까지의 오랜 간병, 사업유전자가 없는 아들들의 실패가 줄줄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가세는 조각난 헝겊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실패처럼 제 몸에서 한 올 한 올 실을 풀어 굴곡진 삶을 기워오던 어머니는 마침내 가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시간의 흔적이 쌓이면서 뽀얗고 귀한 미백색은 누렇게 변색이 되었다. 모란이 수 놓인 화려하고 큰 반짇고리 속, 색이 변한 실패는 어쩌면 거추장스럽기만 하거나 쓸모가 없어진 것인지도 몰랐다. 


  버리기도, 가지고 있기도 불편하다는 실패를 굳이 내가 쓰겠다며 챙겼다. 결혼한 지 겨우 일 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작고 콤팩트한 반짇고리에 담긴 커다랗고 변색된 실패는, 날렵함과 아기자기함을 자랑하는 다른 바느질 도구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도 그랬다. 서른도 되지 않은 어린 나와 삶의 내공이 겹겹이 쌓인 어머니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 스며들기가 힘들었다. 나는 나대로, 당신은 당신대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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