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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평근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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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 Oct 19. 2024

포커페이스 1

가면을 쓰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자 눈동자들이 쏟아진다. 순간, 촉박한 일정 탓에 얼굴 가득하던 짜증을 황급히 숨긴다. 급하게 걸친 표정이 거울 속에서 왠지 낯설기만 하다. 오늘도 어쩔 수 없이 포커페이스로 하루를 시작한다. 


  포커페이스는 자신이 가진 패를 상대방에게 읽히지 않기 위해 표정을 숨기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는 상황 혹은 승패가 바뀐다 하더라도 얼굴에 동요를 나타내지 않는 자기 조절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감정에 상관없는 표정 조절은 타인과의 심리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결국 포커페이스는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한 겉면일 뿐,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내면은 외줄 위의 어름사니처럼 위태롭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는 것일 뿐이다. 


  결혼생활은 포커페이스를 요구받는 일이 많았다. 자라온 생활환경과는 이질적인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의중을 먼저 생각해야 했다. 예전엔 느끼는 그대로 표현하고 행동해도 될 사소한 일들마저 조심스러워졌다. 설사 내 의견이나 감정에 반하는 점이 있더라도 가족의 뜻에 따라 표정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발생할 때면 하루에도 여러 번 얼굴을 바꾸었다.


  시어머니와 합가 한 이후엔 더욱 그랬다. 어머님의 방식과 내 생각이 종종 부딪혔다. 그럴 때마다 본래의 얼굴을 감춘 채 착한 며느리의 표정을 달고 살았다. 어느 땐, 어머님 권유에 못 이겨 하늘하늘하게 꾸민 우리 부부 침실에 커다란 모란이 수 놓인 솜이불을 들였다. 무거운 이불에 눌리며 선잠 드는 일이 많아도 싫은 내색을 비추지 못했다. 원래의 얼굴은 가면 아래에서 점점 흐려졌고, 당신의 색채는 반대로 화려해졌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또 다른 포커페이스가 생겼다. 학부모 모임이라는 것은 참 재미있는 집단이었다. 아이 성적에 맞춰 서열이 매겨지고, 그 순위에 따라 주어지는 정보의 질과 량이 달랐다. ‘우리 아이는 아무것도 안 해요’라고 웃으며 말하는 전교 1등 엄마의 주변에 모여 교육이나 학교생활 정보를 얻기 위해 가식적 웃음을 지어야 했다. 때에 따라선 마음에 없는 칭찬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학업성적이 좋은 아이의 부모가 건네는 화려한 전문직 명함은 나를 한없이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후줄근한 옷차림이나 가방이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었지만, 그럴 때면 가장한 웃음조차 초라하게 여겨졌다. 


  어금니가 자주 아팠다. 아침엔 괜찮았다가 저녁이면 찾아오는 아릿한 통증이 제법 오래 지속되었다. 충치가 생긴 것 같아 치과에 들렀더니 의사가 ‘어금니를 힘껏 물고 있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이를 악물고 살았다. 하루에도 여러 번 나를 숨기고 상대의 반응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적으로 고된 하루를 보낸 밤이면 어김없이 치통이 찾아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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