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이원론적 세계관
“크리톤, 나는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을 졌네. 그 빚을 대신 갚아주게.”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기 전, 친구 크리톤에게 한 말이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일본 학자가 지어낸 이야기다)
이 말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뉜다. 아스클레오피스는 의술의 신이다. 이승을 질병의 세계로 보고, 자유로운 영혼의 세계로 떠나간다는 해석이 보편적이다.
우리는 모든 진리를 알고 있으나, 영혼이 육신에 갇혀버린 탓에 모든 걸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육신에 벗어나 진정한 영혼의 세계로 가면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진정한 자유는 소울(soul)에서 스피릿(spirit)으로 거듭나는 일이다.
육신과 영혼, 이승과 저승,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기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 착한 놈과 나쁜 놈 이러한 구분법은 사랑에도 적용된다.
이기적인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르고, 이타적인 사람은 사랑할 줄 아는 이다.
이기적인 사람을 다른 말로 나쁜 놈이라고 한다.
나쁜 놈은 나뿐인 놈이기 때문에 나밖에 몰라 나쁜 놈이라고 부른다.
사랑할 줄 모르고, 베풀 줄 모르기 때문에 이기심이 비롯된다고 한다.
반면에 이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할 줄 아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소크라테스적 이원론적 사고가 만야 사실이라면 현실에서 사랑을 이루는 건 불가능할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승에서의 혼탁한 사랑은 세상을 망쳐놓았을지 모른다.
진정한 사랑은 저승에서나 영혼끼리의 사랑만이 유일하기 때문에.
사랑은 단순한 유대가 아니다. 나와 네가 상호작용하여 특별한 지위로 상정하는 감정이다.
사랑을 한다는 건 그 사람과 특별한 유대를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특별하다는 건 모두가 평범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모두를 사랑하고, 인류애를 발휘할수록 가까운 이웃을 증오한다는 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도 잘 녹아나지 않은가.
사랑할수록 주변 관계를 정리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일지 모른다. 한정된 에너지를 특별한 사람에게 주는 건 경제적 논리에서 자연스러운 이치다.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지 않아도 싸울 수 있다. 사랑의 눈 밖에 난 자에게는 조금 덜 친절하고, 조금 덜 배려하고, 조금 덜 잘해줄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더라도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없는 건 나 역시도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족 이기주의, 지역 이기주의는 가족애의 비뚤어진 모습이 아니라 진정한 실재로 나타나는 걸지 모른다. 가족인가, 남인가라는 양자택일 순간에 가족이 아니라 남을 선택하는 것도 이상한 일일지 모른다.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부자는 가족 사랑을 넘어선 이타심이라고 칭찬받을 수 있지만, 왜 살아생전에 부의 분배를 하지 않았는지, 시혜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여전히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것 아닌가?
우리의 욕망은 사랑과 결부되어 진정한 사랑을 할 수가 없고, 정신적 사랑을 할 수가 없는 것일까?
공유지의 비극은 이기심이 비롯한 것일까?
이기심은 나만을 생각하는 마음이고, 이타심은 남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본다.
우리는 타인의 응시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세상에 태어난 순간 나 아닌 무언가는 반드시 존재하고 우리는 타자를 의식하여 판단하기 때문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지금 내가 가져가지 않으면 다른 이가 가져갈 것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걸지 모른다. 다른 동물은 자기가 충족하면 행동을 멈추지만, 인간은 다른 사람이 가져갈 것을 상상하기 때문에 지금 가져가지 않으면 빼앗길 것을 염려한다.
그것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공유지의 비극은 나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남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겨난 일이다.
그렇다면 세속적 사랑은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닐까?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경쟁하게 만들며, 다툼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 때문일지 모른다.
동의하지 않더라도 한 번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볼 만한 시각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