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 쾌락과 정보의 편식 문제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육체의 쾌락과 영혼의 쾌락으로 나눈다.
영혼의 쾌락은 지속 가능한 쾌락이다. 육체적 쾌락을 잠재우고, 고통이 없는 잠잠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 쾌락을 완전히 다르게 실행한다. 우리는 끊임없는 자극과 정보의 쾌락을 누리며 도파민만을 추구한다.
연애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랜 만남 속에서 서로가 주는 쾌락의 강도가 점점 낮아지면, 마치 ‘사랑이 식었다’는 착각에 빠진다. 사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자극의 역치가 높아진 우리의 뇌가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감각에 가까운데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연애를 오래 지속하는 방법 중 하나는 오히려 쾌락의 역치를 낮추는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늘 새롭고 강한 자극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에피쿠로스가 그랬듯 조용한 만족을 사랑하게 되는 것—그게 지금 우리가 잊고 있는 연애의 윤리이자, 관계를 지키는 기술일지도 모른다.
연애를 오래 하는 방법 중 하나도 쾌락의 역치를 낮추는 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가 많다. 사귀는 사이임에도 너무 오랜 만남으로 서로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유튜브를 보며 서로 각자 할 일을 하며 권태를 누르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오늘날 연애가 더욱 힘들어진 이유는 무지와 편견이 아니라 편향된 정보를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편향된 정보는 쾌락을 낳는다. 뇌를 익숙하게 만들고 내가 알던 정보에만 한정되어 보게 된다. 우리는 겉모습을 더 추구하고, 눈에 익숙한 것을 즐기게 된다. 무지는 알려주면 깨닫게 되고, 편견은 반례를 들면 된다. 그러나 편향된 정보에 반대되는 것을 주면 화를 낸다. 왜냐하면 익숙치 않고 기존에 알고 있는 사실을 버리는 건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연애 시장에서 서로가 피해자임을 호소하는 사회가 된 후로 연애 방식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삶에 정답이 없고, 연애에 정답이 없을수록 정답을 찾게 되는 사회가 되었다. 사회적 정의는 받아야 할 것을 마땅히 받는 것이다. 부정적인 뉴스를 보았을 때 그가 엄벌을 받지 못한다면 통쾌하지 못한 사회다. 연애에서도 제대로 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불쾌감이 치솟는다. 현대 사회는 단순히 도파민과 짧은 쾌락에 빠지는 쾌락 중독 문제가 아니라 성찰하지 않고 쾌락 지수만 올라가며 자극적인 것만 찾는 사회로 나아가는 게 문제다.
자극적인 사회 소식, 남녀 혐오 콘텐츠, 갈등 프로그램 등은 나름대로 두려움을 주지만 또 한편으로 묘한 쾌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 그런 것만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고 반박한다 해도 그런 것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 않냐며 생각을 바꾸려하지 않을 것이다. 혐오 콘텐츠는 가학적인 자기를 낳게 되지만, 결코 바뀌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쾌락 때문이다. 세상의 진실을 하나 더 알고 있다는 믿음, 멍청한 상대편을 조롱하며 얻게 되는 우월감, 나는 저러한 상황에 빠지지 않았다는 안도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자신이 해당 집단의 사람들보다 똑똑하다고 확신을 얻게 된다.
그들은 반박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멍청이들이 어떤 자료를 가져오든 그것이 사실일지언정, 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 역시 자유로운 존재일 수 없다. 나도 주변에 실제로 겪는 이야기를 듣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연애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기성세대보다 들은 이야기가 많고 똑똑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유튜버가 할 법한 이야기를 현실에서 들으니 조금 묘 기분이 들었다. 국가는 아이를 낳게 하는 도구로서 바라본다고 하거나 기성세대는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하고, 아이 낳은 이들이고 요즘은 인터넷과 정보의 발달로 사람들이 결혼과 육아가 손해라는 걸 알았으니 안 한다는 것이다.
이 말에 사실 반박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물론 결혼과 육아가 손해를 보는 양상일 수 있지만 왜 더 좋은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그러한 정보는 왜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합리성일까.
나 역시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아무래도 사회적 분위기와 경제적인 이유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 (결혼을 하고 싶냐고 묻는 거보다, 아주 이상적이고 행복을 가져다 주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기로 계약할거냐고 물으면 나는 그렇다고 할 것이고, 지긋지긋하고 괴롭고 갈등과 싸움만 일어날 일만 가득한 사람과 함께 살 거냐고 하냐면 아니라고 할텐데, 현실적인 결혼은 이 중간 어딘가에 속하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사회적 분위기가 조금만 바뀌면 결혼하지 않겠다던 사람도 금방 바뀔 듯 보이면서 ‘기성세대의 무지’라든지 이번 세대가 더 똑똑해서라는 거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정보가 너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만큼 다양한 정보를 얻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심지어 Chat GPT에게 물어도 나와 나눈 대화 레퍼토리를 외우는 바람에 물어보는 대답은 즉각적으로 얻지만, 다른 방식의 대답을 구하기는 어렵다.
결국, 우리가 처한 이 시대의 진짜 문제는 ‘정보의 무지’가 아니라 ‘정보의 편향’이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듣고 싶은 정보만을 듣고, 익숙한 이야기만을 반복 소비하며, 성찰보다는 자극을 선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선택은 단지 개인의 기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가 허락한 선택지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 근본적인 한계로 작용한다.
연애든 결혼이든, 혹은 그에 대한 거부든, 그것이 ‘합리성’으로 포장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이라는 감정, 함께 살아간다는 실존적 선택의 깊이에 대해 묻지 않게 된다. 대신 "손해냐 이익이냐", "시간 낭비냐 아니냐"라는 프레임 속에서 삶의 결정을 내린다. 이는 감정의 복잡성을 경제적 셈법으로 환원하는 시대의 병리이다.
하지만 삶은 계산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망과 혼란, 모순과 충돌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도 한다. 그렇기에 더 중요한 것은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의 외부에 있는 삶의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둘 수 있는가이다.
정보에 익숙해진 우리의 뇌를 다시금 낯설게 만들고, 익숙한 판단을 잠시 멈추는 용기야말로 오늘날 사랑을 지속시키는 방법이고, 우리가 여전히 연대할 수 있는 이유다.
다시 말해, 연애를 오래 하는 방법 중 하나는, 쾌락의 역치를 낮추는 것뿐 아니라, 익숙함을 참아내고 낯섦을 받아들이는 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혼란스러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실천해야 할 사랑의 연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