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욕적 사랑은 무엇인가
스토아학파는 이성을 통한 덕 실천을 중시하고, 금욕주의를 하도록 하였다. 금욕주의는 스토아의 독자적인 태도는 아니다. 에피쿠로스학파와 비교하였을 때 좀 더 두드러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토아학파는 우주가 질서정연하여 진리가 자연법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본 듯하다. 자연법은 실정법과 달리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적 이상과 일치하는 법 질서다. 실정법은 법적 정의에 어긋난 적이 많지만, 정의롭고 선한 법 자체가 자연법에서 나온 개념이기 때문에 실정법과는 다르다.
사랑에도 자연법 같은 게 존재할까.
금욕을 통한 사랑의 실천은 대체 무엇일까.
사랑은 즐겁고 행복하지만, 지금까지 즐겁고 행복한 사랑만을 얘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짝사랑에 대한 고통, 다른 이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집착, 혼란, 질투, 소유욕을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사랑은 사람을 광적으로 만드는 건 맞지만, 광적인 상태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다.
사랑과 광적 상태는 실로 복잡하다.
하지만 금욕적인 상태는 더 어려워진다. 모든 감정에는 절제된 행동이 필요하다. 사회적 기준에 맞춰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감정 표현은 ‘감정’과 ‘표현’이 나뉘는데, 감정은 내가 느끼지만 표현은 상대에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분리가 일어난다. 이 때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미성숙하게 전달한다면 자칫 곤경에 처해질 수 있다.
감정과 이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눌수록 서로 다른 경향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이성적일수록 감정을 절제하고, 금욕을 추구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할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이성적인 사랑은 가장 금욕적으로 다가간 걸지도 모르겠다.
금욕적 사랑을 보통 육체적 쾌락을 배제한 채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고도의 지적 행위로 바라보는 원유는 이성과 감정이 서로 분리되었다고 보기 때문인 거 같다.
대표적으로, F와 T를 구분하며 말할 때 주로 쓰인다.
나는 T라서 공감 못한다. 혹은 소설을 잘 모른다.
나는 F라서 감정적이다. 혹은 과학을 잘 이해 못한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깊이 있는 공감과 통찰을 잘하는데도
MBTI가 등장한 뒤로 F는 머저리가 되고 T는 싸이코패스가 되었다.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금욕적인 선택을 하는 건 이성주의에 대한 이분법적 집착때문이라 생각이 든다.
금욕적 사랑 역시 육체를 제외시키면 제외시킬수록 더더욱 몸에 집착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금욕적 사랑은 조건 없는 희생과 상대를 도구화하지 않고 진정한 인간으로 바라봄을 실천하는 행위일 수 있다.
하지만 금욕에 집착할수록 몸에 대한 거부적 열망도 함께 커지기 마련이다.
금욕이 수단에 머물지 않고 목적 그 자체가 될수록 본질을 잃어버린다.
자연법의 사랑은 금욕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랑에서 중요한 건 아주 긴 시간을 오랫동안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란, 소금 한 가마니를 함께 먹는 시간동안을 지내봐야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연인이라면 소금 한 가마니가 아니라 그 이상을 먹어야 진정으로 이루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동안 연인은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성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 비록 추상적이긴 하지만 자연법으로서의 사랑은 실정적 사랑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모호한 걸지 모른다.
스토아적 사랑은 관망적이고 비참여적이라 할 수 있다. 연인 간의 사랑보다는 중요할 때 통찰력을 제시하는 종교적 사랑에 가깝다. 금욕은 욕망 전반에 대한 주권을 확보하는 일일 수 있겠지만, 사랑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바람에 오히려 올바른 사랑과 올바르지 못한 사랑을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나눌 위험이 있다.
욕망 없는 사랑은 비인간적이고, 윤리 없는 사랑은 위험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 앞에서 언제나 갈등하고, 그 갈등 속에서 점점 인간다운 사랑을 하는 일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