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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신플라톤주의를 비판하며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균열이다.

by 비평교실

개별 사물의 공통적 속성을 뽑아 추상화를 시키면 이데아가 된다. 이데아는 사물의 원형이다. 사물의 원형을 한 번 더 추상화시킨다면 점점 원형의 원형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원형의 원형의 원형을 가다보면 결국 하나의 원형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 중세에서는 그것을 기독교적 신으로 보았다.


플라톤의 이데아, 기독교의 유일한 신 그 사이에는 신플라톤주의가 있었다.


(플라톤주의 – 신플라톤주의 – 중세 기독교)


신플라톤주의는 일자(一者)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일자는 어떤 것으로 규정될 수 없다. 신비주의자들에게는 언어를 초월한 그 무엇.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우리는 때로 사랑을 이러한 태도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사랑은 신비하며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세속을 초월한 그 무엇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사랑은 위대하다.”고 말하는 이들의 태도를 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연재 내내 말해왔지만 이러한 초월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을 현실과 다른 어떤 것으로 초월한 무언가로 바라볼수록 사랑은 그 본래의 의미를 점점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일자를 향해갈수록, 사랑은 초월적이고 신비화되지만, 현실의 사랑과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사랑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요소를 호르몬과 같은 화학적이고 기계적인 매개물로 바라볼 필요도 없지만 신비스럽고 윤리적인 해탈로서 바라볼 필요도 없다고 본다. 사랑을 과학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것도, 윤리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것 모두 사랑에 대한 단면을 바라보는 것일 뿐, 전체를 본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랑에 대한 신비화된 태도는 일자(一者)에 대한 갈망으로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대상이 일체감을 느끼며 하나가 되는 과정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존재를 존중하며 융화를 통해 신비감을 느끼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혹은 사랑을 말하는 낭만주의자들은 이러한 태도를 견지한다. 그들은 사랑이 하나됨을 느끼며 어떠한 일체감을 윤리적 성숙을 고양시켜나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과 윤리성은 얼마나 관계가 깊을까?


<립반윙클의 신부>에서 딸이 AV배우가 된다고 하자 어머니는 딸이 AV 배우를 하지 못하도록 가혹하게 폭행하였다고 주인공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일반적으로 누군가 AV 배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해서 폭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미친 사람이거나 그런 걸 빌미 삼아 폭행을 일삼는 범죄자일 뿐이다.


하지만 딸이 AV 배우가 된다고 말하였을 때 어머니가 느꼈던 좌절감, 무력감, 분노, 절망감이 비윤리적인 폭력으로 이어진다고 하였을 때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타인에게 냉대당하고 거부당하는 것을 마주하게 될 현실을 막기 위해 비윤리적인 행위를 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랑을 너무 신비적으로 바라보거나 인간의 감정과 윤리적 행위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생각한다.


윤리적으로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의무와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보편적이고 추상화시킬수록 사랑에 대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랑은 점점 지워지는 것이다. 즉, 사랑은 초월도, 윤리도 아니다.


사랑은 고귀하거나 깨끗하기만한 감정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막고자 하기도 하고, 절망 끝에 폭력에 대한 충동으로 변질된다. (정확히는 폭력이 사랑이 아니라, 폭력에 이르도록 만드는 충동이 사랑이다.)

사랑은 감정이지만, 상호 관계성와 사회적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물질이나 정신으로 환원될 수 없는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이란 동질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가 되는 일자적 신비감이 아니라, 오히려 나와 다른 선택을 할 때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흔들리는 그 지점이 사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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