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중용이 아니야.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치우침이 없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자세다. 비겁과 만용 사이에 있는 것이 용기이고, 인색함과 낭비 사이에 있는 것이 후함이다.
비겁과 만용은 서로 반대되며, 비겁과 용기, 만용과 용기도 서로 반대되어 있다. 용기는 비겁과 만용을 모두 물리친 합리적인 태도와 판단력이 용기다.
사랑의 중용은 무엇일까.
사랑이 과도하게 치우친 걸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곁에 두지 못하면 안달나며, 떠나지 않을까 염려하며 자신보다 더 즐거운 소재가 존재할까 봐 질투한다.
반대로 사랑이 적은 걸 무관심이라고 한다. 무엇을 하든 내버려두고, 방임하며 방관한다. 무책임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말하는 게 이런 이유일지 모른다.
사랑은 집착하지도 않으며 방치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 단어를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 심지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적당한 사랑이 무엇인지 애초에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아, 친밀하고도 우정을 나누는 존재를 사랑이라고 하였지만 그리스 시대는 동성애를 더 신성시 여기고, 남녀 간의 사랑을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다보니 아무래도 사랑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을 때 달라진 시대상을 감안한다해도 알기가 무척 어렵다.
심지어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을 사랑과 그리스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의 사랑과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의 사랑이 다르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여도 잘들 사랑하며 살고는 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제조사가 필요한 내용만 알면 되지 모든 내용을 알 필요는 없다. 양자역학을 모르고, 부력의 원리는 알지 못하지만 거대한 목재 함선을 바다 위에 띄우는 일은 가능하였다.
애시당초 사랑이 중용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한 일인지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랑은 집착과 무관심의 중간일까?
사랑이라는 건 애초에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배타성을 가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를 똑같이 대한다는 건 아무런 의미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사랑에는 배타성이 없을 수 없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체력과 노력도 언젠가는 고갈된다. 차라리 체력과 경제력, 노력을 모두에게 골고루 분
배하느니, 선택과 집중을 통해 몰아주는 것이 특권적 위치를 부여하는 사랑이나 다름 없다.
세계 최고의 요리사는 모든 요리를 모두 똑같이 사랑하지 않는다. 라면부터 캐비어 파스타를 모두 똑같이 사랑하는 요리사는 제대로 된 요리조차 만들어내지 못할 게 뻔하다. 뭐가 덜 익었고 뭐가 불었는지도 알지도 못할테니까.
요리사의 요리에 자기만의 철학이 있고, 자기만의 방향을 갖고 있다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랑은 어떤 특정 대상에 방향성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 방향성은 다른 방향성을 가지지 않는 배타성을 가진다는 건 자명하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집착도 강해질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것이 어떻게 발현되느냐는 윤리적인 문제다. 그러나 사랑은 윤리를 넘어선다. 윤리에 어긋난다고 해서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윤리를 벗어난 사랑을 할 경우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윤리는 대체 누가, 그 사랑은 대체 누가 정할 수 있을까.
무관심은 정말로 사랑의 반댓말일까? 우리는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무관심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카톡을 매일매일 확인하는 사람보다는 카톡을 들여다보는 일 자체에 무관심한 사람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사랑한다는 건 내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내 추악함, 그 사람은 알지 못하지만 자각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함, 모두의 기억 속에 잊혀졌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치스러운 과거, 비밀, 비도덕적 행위, 만약 그 정보를 알았을 때 두 번 다시 같은 사람이라 인지하기 어려운 ‘사소한’ 정보들에는 무관심해야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에 아주 조그마한 관심이라도 가지는 부모를 자식을 소유하기 위해서 그런다고 비난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연인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일기장과 문자 메시지, 핸드폰에 있는 모든 기록을 샅샅이 그러나 아주 작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무례함이 될 것이다.
집착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의 반댓말은 무관심이다.
그러나 사랑에는 집착이 없을 수 없고, 무관심마저도 사랑의 표현 방식이다.
사랑은 윤리를 뛰어넘지만, 윤리를 뛰어넘는 순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 고민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