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초등학교 입학부터 친한 엄마들끼리 페북 메신저 창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은 별로 가깝지 않은, 다수가 필요한 채팅방에 경우 왓츠앱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긴 했지만, 친한 사이엔 아직 페북을 많이 쓴다.
아이 입학 첫해에 친해진 아이엄마들끼리 페북 메신저 창을 열어두고는 매일이 멀다 하고 수다를 했다. 매년 해가 가다 보니 그중에서 두 명씩 같은 반이 될 때도 있고, 그중 세 명이 같은 반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호주는 학년 말에 각자 친한 친구 3명을 적어 내면 선생님께서 그 아이들과 함께 반을 배정될 수 있도록 신경 써주신다.
3학년, 우리 아이는 라니와 같은 반이 됐다.
우리 아이는 어릴 적부터 특별한(?) 재주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CCTV능력이다. 유치원 때부터 오늘 무엇을 배웠는지는 기억을 못 해도, 오늘 유치원에 어떤 아이가 결석했고, 출근한 선생님이 누군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무슨 옷을 입었는지까지 모두 기억해 와서 이야기해 주는 능력이 있었다. 워킹맘이라 아이와 매일 같이 있어주지 못했던 나에게는 아이의 그런 능력이 아주 유용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꼭 내가 아이와 함께 유치원에 하루종일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도 그 능력은 계속됐고, 아이의 일과를 알 수 있어서 좋았지만 퇴근 후 가끔 피곤한 날에는 웃는 얼굴로 귀에 피가 나도록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곤욕일 때도 있었다.
어느 날부터 우리 아이는 방과 후 집에 오면 라니가 수업시간에 화장실을 10번도 더 간다며 이야기했다. 시험시간에는 친구들에게 답을 알려달라고도 했다고 하고, 친구들과 의견이 맞지 않으면 욱 하는 화를 못 이기고 주먹질이 나온 적도 있다고 했다. 내가 그동안 봐온 라니는 아주 조용하고 쑥스러움이 많고, 순수한 소녀다. 주먹질을 할 거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 아이의 CCTV 능력도 이제 성능이 좀 떨어지나? 생각할 정도로 우리 아이가 말하는 라니의 모습과 내가 기억하던 라니의 모습이 많이 달랐다.
여느 때와 같이 엄마들끼리 메신저 창에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라니엄마가 라니가 학교생활을 어려워한다고 호소했다. 한 수업시간에 집중을 못하고 화장실을 14번도 간 적이 있고, 집에서도 숙제시간이 10-15분이지만 그마저도 꾸준히 하지 못한다고. 가장 중요한 건 집에서 화를 이기지 못해 욱하는 감정에 물건을 던지거나 식탁의자를 부러뜨리기도 했다고 했다.
엄마의 촉이라는 게 이런 걸까.
라니 엄마는 결국 라니를 데리고 정신과 상담을 받았고,
라니는 ADD (Attention deficit disorder) 판정을 받았다.
ADHD는 들어봤어도 ADD는 처음 들어봤다. 혼자 알아보니 ADHD와 증상은 모두 같지만 Hiper (과잉)이 빠진 조용한 집중력 결핍장애라고 한다. ADD와 ADHD는 같은 주의력 결핍이지만, ADD는 과잉행동이 없기 때문에 증상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아 진단이 늦어진다.
이게 무엇인가 궁금해하는 것도 잠시,
가깝게 지내는 사이에 아이가 그런 진단을 받게 됐다고 이야기하니까 어떻게 응답을 해줘야 할지 난감했다.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일이라 내 머릿속을 수십 바퀴 뒤졌지만 이런 상황에 해야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찰나,
채팅방에 있던 호주엄마들이 앞다투어 축하메시지를 전했다.
"축하해요! 이제 라니에게 어떤 도움을 줘야 할지 알게 돼서 너무 기쁘겠어요"
"다행이네요 이제 라니가 필요한 도움을 받게 되었다니"
라니엄마도 라니가 ADD약을 복용하면서 증상이 나아지는 게 보여 너무 기쁘다며, 일찍 정신과 상담을 받게 하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했다. 아이가 정신과 진단을 받아 기쁘다는 게, 친한 사람의 아이가 정신과 진단을 받은 것을 축하해 주는 게 분위기가 사실 당황스러웠다.
경험이 부족해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가진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호주엄마들의 대화를 곱씹어보며 생각해 봤다. 라니엄마는 사랑하는 아이에게 필요한 도움을 찾기 위해 병원을 찾은 것이고, 진단을 통해 아이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주위 다른 이들에게 알려 아이가 이해받고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것이 엄마의 최고의 노력이며 사랑이라는 걸 깨달았다. 무조건 아이가 정신과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안 좋은 소식이고, 그 부모는 힘들겠다는 생각부터 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라니의진단 소식은 그 집의 우환이 아니라 기쁜 소식이었다.
해가 갈수록 ADHD, ADD, 자페 등 소아정신질환을 가진 아이들을 더 흔해지는 것 같다. 호주엄마들은 처음 친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이가 가진 질병이나 장애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아직 많이 친해진 게 아닌데 이런 걸 왜 나한테 이야기하지? 하며 당황스러운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나도 그런 엄마들이 이야기를 해주는 것에 대해 땡큐라고 말한다. 미리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다른 사람이 그 아이에게 어떻게 대해주어야 하는지 알게 해 주고, 오해를 부를 수도 있는 아이의 행동에 왜곡해서 생각하지 않도록 도움을 준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호주는 아이가 정신과 진단 혹은 장애판정을 받게 되면 학교 교장과 미팅을 통해 아이가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지 의논한 뒤 학교에서 직접 교육청에 펀딩을 신청한다. 교육청에서 서류심사를 거쳐 학교에 지원금을 보내준다. 지원금은 다양하게 사용이 되는데, 가장 흔한 것 중 하나는 학교에서 도움이 필요한 아이를 위한 전담 헬퍼를 고용한다. 선생님께서 수업을 이어나가시는 동안 헬퍼선생님은 도움이 필요한 한 아이가 수업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선생님께서는 학급아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수업을 잘 진행해 가실 수 있고, 도움이 필요한 아이는 일 대 일로 도움을 주는 헬퍼 선생님이 하루종일 전담으로 옆에 계셔 주시기 때문에 수업이 수월히 진행된다. 교실 외 수업, 소풍이나 운동회날에도 함께 해주시고, 증상이 심한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함께 해주시는 헬퍼 선생님이 계신다. 헬퍼 선생님은 부모와 직접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가질 수 있어서 학교에서 특별한 일이 있었다거나 부모가 염려하는 부분들을 수시로 상의할 수 있다. 도움이 필요하지만 증상이 심하지 않은 아이들은 헬퍼를 배정받는 대신 교실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도구들을 지원받는다. 예를 들면 수업시간에 자리에 앉아있기 힘든 ADHD 아이들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된 쿠션의자, 쿠션매트 등을 지원받고, 자폐아이들을 위해 해드폰을 제공하기도 한다. 감정 조절이 어려운 ADHD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레고 스테이션도 있다. 이런 특별한 아이들을 위한 지원은 유치원에서부터 받을 수 있다.
The Disability Discrimination Act 1992 and the Disability Standards for Education 2005 outline the requirements for education providers to ensure that all students with disability can access education ‘on the same basis’ as their peers, education providers must support their individual needs by reasonable adjustments and tailored teaching strategies.
호주 장애인 차별금지법에 따르면, 장애가 있는 아이들 모두 다른 아이들과 동등한 기준으로 수업을 받아야 하며, 교육기관은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 개인의 필요에 따라 합리적인 조정과 맞춤형 수업을 반드시 지원해야 합니다.
이렇듯 학교와 나라에서 아이에게 맞는 적절한 도움을 주는 법과 제도들이 마련되어 있고, 실제 학교와 유치원에서 잘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호주 부모들은 아이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바로정신과 상담을 받고 아이가 진단을 받으면 즉시 학교와 상담을 통해 아이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아이가 장애나 정신과적 질병이 있다고 해서 학교와 나라가 아이를 차별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나 아이들 엄마사이에서도 차별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