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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린 Oct 05. 2024

호주 엄마들의 유언장

오랜만에 아이 친구 엄마들과 넷이 만나 저녁을 먹었다. 아이들 첫 학년에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 온 엄마들이라 학교에서 자주 만나곤 하지만 서로 바빠 따로 엄마들끼리만 식사하는 자리는 만들지 못했는데 다들 이번엔 맘먹고 남편들에게 아이들 맡기고 저녁식사를 하게 됐다.


아이들 없이 엄마들끼리만 이야기하는 건 가장 짜릿한 수다 타임이다.


호주 엄마들이 추천한 뷔페에서 오랜만에 느긋한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이 없지만 이야기의 주제는 아이들뿐이라 꼭 아이들이 함께 있는 것도, 없는 것 같기도 한 시간이었다. 평소에 간단히 수다할 때는 항상 긍정적인 이야기들이었지만 여유 있게 식사하며 이야기하다 보니, 엄마들 하나, 둘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꺼내 놓았다.


코나엄마는 어릴 적부터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코나를 위해 멜라토닌을 처방받아 먹이고 있는데 코로나 시기에 멜라토닌 처방을 받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져 멜라토닌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라니 엄마는 셋째가 불러도 대답 없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느끼던 때쯤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놀지 않고 혼자 화장실에 가서 벽에 그림을 그려놓았다는 연락을 받고 걱정이 확신이 되었고,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을 때 자폐증상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이야기가 길어지던 중, 레스토랑 예약시간이 끝나 나와야 했고 오랜만인데 집에 가지 말고 한잔 하자는 엄마들에 성화에 못 이겨 그러겠다고 했다. 아이들 일정 때문에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하는 라니 엄마를 배웅한 후 나, 코나엄마 그리고 레아엄마 셋이서 펍에 갔다. (펍* Pub은 호주 사람들이 주로 맥주를 즐기러 가는 술집이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펍에 들어서자 라이브 뮤직이 크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들어오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대형 맥줏집 바이브. 결혼 후 아이들, 남편 없이 펍에 온건 처음이니까 약 10년쯤 됐던 것 같다. 오랜만에 복잡하지만 들뜨는 기분을 느꼈다. 우리는 아이들과 와서는 절대 못 앉을 바 테이블을 일부러 찾아 앉았다.



얼마나 밖을 나와보지 않았는지, 우리들 나이를 다 합쳐도 평균 나이 30 후반인데 QR로 주문을 하는 걸 몰라 한참이 걸렸다. 펍에 온사람들을 보며 두리번거리면서 각자 이런 맥주집을 다니던 젊었을 때를 회상했다. 술이 나오고, 편안해지니까 아이들 이야기가 아닌 서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줌마들의 이야기는 남편이야기로 시작하고 시댁이야기로 이어진다.


아기아빠들까지 오래 보고 지내온 사이인데도 각 집의 사정을 정말 들어봐야 하는 거더라. 겉으로 보이는 것 외에도 속사정이 다 있었다. 이 이야기는 좀 길어서 나중에 번외 편으로 써보려 한다.


남편, 시댁이야기를 하고는 각자 자라온 과거부터 친정부모님 이야기까지 술술 털어놓게 되었다. 아주 훨씬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아줌마들의 전우애가 돈독히 쌓이는 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레아 엄마가

아주 자연스럽게 툭하고 서장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갑자기 웬 유서장이라니.

아직 40도 안된 엄마가.

이게 맥주를 마시면서 수다 떨다가 할 이야기인가?


휘둥그래 커진 내 눈을 보며 레아엄마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벌써 유서를 작성해서 변호사까지 만나 공증을 마쳤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코나엄마가 자신도 유서장을 이미 작성했다고 했다. 충격과 호기심의 혼돈 속에 내 질문 폭격이 이어졌다. 보통 몇 살에 유서장를 작성하는 것이 맞는 것이며, 이게 흔한 일인지. 유언장을 쓰면 어떤 내용들을 넣어야 하는지, 어떻게 쓰는 건지 등


그들은 유서 작성을 아직 안 했다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아이에게 말하듯 자세히 설명해 줬다.

호주 부모들은 아이가 생겨 책임질 가족이 생기면 나이불문 하고 대부분 유서장을 작성한다고 했다.

유서장의 내용을 주로 아이들 보호처, 재산상속 그리고 의료적 치료 혹은 사후 장례에 관한 이야기들을 넣는다고 한다.


예를 들면 주로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을 때,

아이의 주 보호자는 누가 될 수 있으며,

재산은 어떻게 정리를 해서 상속이 될는지.

연명치료나 장기기증 유무, 장례 절차 등을

미리 결정해 유서를 작성하고

때때로 바뀌면 계속 수정을 해 나간다고 했다.


우리들의 주 이야기는 아이들의 보호자를 누구로 선정하냐는 것이었다. 한국의 정사상 우리는 두 부모가 동시에 사망을 하면 아이는 당연하게 조부모님 혹은 가까운 친척집에 아이가 맡겨진다. 하지만 레아엄마나 코나엄마의 말에 따르면 부모가 조부모의 손에 아이들이 보호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수도 있고, 형제나 자매 중에서도 믿고 지내는 사이가 있을 수도 있으니 부모가 직접 지정을 해두는 것이 좋다고 했다. 또한 멀리서 자주 보고 지내지도 않은 가족에게 아이가 맡겨지기보다 아닌 이웃이라도 어릴 적부터 우리 아이를 지켜봐 온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가족보다 이웃을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했다.


머리가 띵했다. 내 목으로 넘어가던 맥주가 차가운 생수로 바뀌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는 동갑내기 30대 중반이고 솔직하게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상상도 이야기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코나 엄마와 레아엄마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불멸의 인간도 아니고 언제 어디서든 죽음은 찾아올 수 있는 건데, 어떻게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고 살았을까. 혹시나, 만일에라도 우리 부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아이를 보호해 줄 어떤 것도 준비해두지 않았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


호주 부모들이 아이가 생겼을 때부터

유서장을 준비해 두는 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 없는 순간에도

아이를 보호해 주려는

진정한 부모의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귀가 후 남편과  유언장에 대해 긴긴 대화를 했다. 남편 또한 생각해보지도 못한 이야기라 당황스러워했지만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혹시 나 겪을 수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후로 우리 부부는 연명치료, 장례절차 등 편안하게 각자 원하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아이들 앞에서도 숨기지 않고 이런저런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더 자세한 플랜을 통해 우리의 유언장을 완성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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