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는 퇴직금 제도가 없다. 그렇다면 퇴직금이 없는 호주에서 사람들은 은퇴 후의 삶을 어떻게 준비할까?
누군가 호주에서 회사원 생활을 하며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호주의 연금 제도라고 말할 것이다. 호주의 근로자들은 특별한 재테크 지식이나 계획이 없어도 단지 일을 하는 것만으로 노후자금을 준비할 수 있다.
호주에서는 노동법에 따라 고용주는 모든 근로자에게 연금(Superannuation)을 지급해야 한다. 아주 작은 구멍가게의 직원부터 청소년 아르바이트생 그리고 해외 노동자까지 모두 연금을 지급받는다. 실제로 만 15세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30대 초반에 벌써 연금 계좌에 10만 호주달러(약 1억 원)를 모은 사람도 봤다.
호주의 연금 제도는 1992년, 월급의 3%를 연금으로 적립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단계적으로 인상되어 2025년 현재 기준, 급여의 11.5% 를 연금으로 지급하고 있으며, 회계연도 2025/26년부터는 12%로 상향될 예정이다. 이렇게 적립된 연금은 개인이 선택한 연금관리 회사(Super Fund)를 통해 운용된다. 호주에는 수십 개의 연금관리 회사가 있으며, 근로자는 자유롭게 회사를 선택하고, 변경할 수도 있다.
연금은 단순히 저축되는 것뿐만 아니라 투자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도 있다. 부동산, 주식, 채권 등 다양한 분야에 투자가 가능하며, 자신의 투자성향에 따라 직접 투자 분야를 택할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연금 상품에는 생명보험과 영구적인 장애 시 보장되는 TPD(Total and Permanent Disability) 보험이 기본으로 포함되어 있어, 일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호주 정부가 이러한 연금 시스템을 도입한 이유는, 평생 열심히 일한 이들이 연금 없이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해 노후를 힘들게 보내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이를 개선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호주 사람들은 예금이나 저축이 익숙지 않아, 자발적인 노후 준비에만 의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호주의 연금 제도는 의무 가입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근로자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연금 계좌를 갖고, 고용주는 급여와 별도로 그 계좌로 연금을 넣어준다. 고용주가 직접 연금 계좌에 넣기 때문에 근로자는 보지도 만져보지도 못한 돈이 연금계좌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다. 이렇게 모인 연금은 만 60세가 되기 전까지 인출할 수 없다. 노후자산을 강제로 쌓이게 만드는 제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신혼 초, 생활비가 빠듯해 공과금이 연체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전기세 고지서를 들고 한숨만 쉬던 나는, 마지막 수단처럼 연금관리회사에 전화를 걸어 내 연금계좌의 일부라도 인출이 가능한지 문의했다. 당시 내 연금 계좌에 들어 있는 금액이 은행 잔고보다 많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단호한 “No”였다. 그때엔 내 돈을 내가 필요할 때 쓸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답답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만약 연금을 수시로 인출할 수 있었다면, 필요할 때마다 야금야금 꺼내 쓰다 결국 남는 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호주에서는 60세가 되어 연금을 수령할 수 있게 되더라도, 일을 하길 원한다면 계속 일할 수 있다. 호주에서는 직원 채용 시 나이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명백한 차별로 간주되며, 법적으로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호주의 채용 공고에는 나이 제한이 명시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 회사에서도 60세 이상에 채용되신 분들이 여럿 있다. 이들은 오랜 경험과 실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능력과 의지가 있다면 계속 일을 할 수 있다는 점 역시, 호주 사람들이 노후를 준비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