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연, 지연, 혈연 없는 공평한 사회
한국사회에서는 '인맥이 전부다', '학연, 지연, 혈연이 없으면 취업도 어렵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 부조리에 치가 떨려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호주 같은 영어권 국가는 공정하고 평등한 기회를 주는 사회라는 기대를 가지고 해외취업을 꿈꾸는 것 같다.
아쉽지만 호주에서 내가 10년 넘게 회사생활을 하면서 겪은 호주사회는 사실 그렇지 않다. 인사부서와 아주 가깝게 일하는 나는 '우리 아들이 이번에 방학에 일을 찾는데 학생이 할만한 쉬운 자리 없을까?' '저 사람이 부장 아들이래' '임원분 식구니까 신경 좀 써줘'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가족이 경영진인 경우, 직계가족은 물론 사촌이나 팔촌까지 다양한 가족 구성원이 회사에 취직해 함께 일하는 경우도 봤다. 혈연뿐 아니라 같은 지역출신, 같은 학교 동문들이 취직과 승진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호주에서는 회사에 지원할 때, 그 회사에 근무 중인 지인이나 추천인을 적는 칸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호주에서도 인맥, 즉 사회적 네트워크의 힘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호주가 한국처럼 학연, 지연, 혈연이 만연한 사회라는 것이 잘 알려지지 않은 건 호주 사회는 겉으로는 '공정함'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나이, 성별, 국적을 따지지 않는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아주 비공식적으로 은근하게 아는 사람들끼리의 네트워크가 이루어진다.
호주에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호주가 인맥만 가지고는 성공할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은 틀림없다. 호주는 취직을 쉽게 하더라도 실력이 없으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누구의 아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잘하는 사람'이 오래 살아남는다.
#쿨하게 사표 내고 굿바이
퇴사에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인간관계'가 그중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꼴 보기 싫은 윗사람, 내가 다 해놓은걸 슬쩍 자기 공으로 돌리는 동료, 어려운 일은 못하겠다며 다 떠넘기는 후배 등등. 마음에 품고 다니던 사직서를 내밀고 다시는 안 볼사람들이라며 시원하게 등 돌리고 나오는 그 짜릿한 순간을 상상해보곤 한다.
호주에서는 구직시 '추천인 (reference)'이 필수로 요구된다. 최소 두 명의 추천인을 이력서에 기재해야 한다. 이직 시에는 전에 다니던 회사의 상사를 추천인으로 적어야 하며 첫 직장의 경우 교수님을 적기도 한다. 인사과에서는 지원자의 추천인, 즉 지원자의 전 상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 사람의 평판을 확인한다. 서류와 면접에 통과했다고 하여도 이 과정에서 전 상사들에게 안 좋은 코멘트를 받았다면 구직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꼴 보기 싫은 상사를 피하기 위해 이직을 결심했는데, 결국 이 지긋지긋한 회사를 탈출하기 위한 열쇠를 그 상사가 쥐고 있는 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직을 결심했거나 언젠가라도 이직을 할 마음이 있다면 꼴 보기 싫은 상사일수록 마지막까지 친절하게 웃으며 대해야 하며, 회사 동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사표를 내거나 인수인계에 소홀하고 무책임 없이 떠나는 건 회사에서 쌓은 경력을 내 이력에서 포기해야 할 각오를 해야 하는 것과 같다.
호주에서는 퇴사하려고 마음먹은 친구에게 'Do not burn the bridge'라는 말을 자주 쓴다. 직역하면 '다리를 불태우지 말라'. 즉, '앞으로를 위해 인연의 연을 끊지 말라'라는 뜻이다. 순간적인 감정으로 다리를 불태우지 말고 떠나는 마지막까지 감정적보다는 이성적으로, 프로답게 다음을 위한 다리를 남겨야 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