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참조하여 쓴 글입니다.
나는 지금 충주로 가고 있다.
나는 트럭 운전사다. 나의 트럭은 수많은 물건 중에서도 생명을 옮긴다. 바로 가축이다. 나는 각종 동물농장에 들러 악취가 나는 트럭에 가축을 실은 채 도살장으로 향한다. 잔인한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게는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차피 내가 들렀다 가는 동물농장의 99.9%는 공장식으로 운영되는 곳들이다.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떨어져 좁은 우리에서 다리조차 펴지 못한 채로 평생을 보낸 가축들에게는 우리나 트럭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가축들이 보내는 삶은 내가 하루를 보내는 회색 빛의 고속도로만큼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다르다. 오늘은 99.9%에 속하지 않는 농장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내가 가끔 들르는 농장은 다른 농장들과 달랐다. 할아버지가 홀로 운영하는 그곳은 돼지들에게 대용량 사료가 아닌 산속의 풀을 주는 곳이었다. 할아버지는 새끼돼지들이 태어날 때마다 화이트보드에 돼지들의 이름을 붙였고, 새끼돼지들은 어미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젖을 먹었다. 이렇게 운영되는 농장이 별로 없기에 어떤 영화감독이 촬영을 하고 가기도 했다. 그 감독이 채식하는 줄 모르고 할아버지가 자신의 돼지고기를 선물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폭소했다.
다른 농장 주인들과 다르게 나와 할아버지는 친했다. 여유가 있을 때는 할아버지의 집에 들러 함께 소주를 마시기도 하고, 할아버지가 새로 태어난 돼지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소수의 돼지들만 있으니 누가 누구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유독 아끼는 돼지가 따로 있었다. 그 돼지의 이름은 눈꽃이었다. 갓 태어났을 때 지은 이름이지만, 갈색 털에 하얀 점이 박혀 있어 그에게 꼭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나는 암컷인 눈꽃이 그 농장의 여물 속에서 태어나 새끼를 낳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눈꽃을 도살장으로 데려가는 날이다.
나는 정오 즈음에 할아버지의 농장에 도착하였다. 할아버지는 이제 갓 새끼들과 떼어놓은 눈꽃을 힘겹게 데려왔다. 그나마 나를 보고는 조금 진정하기는 했으나, 트럭에 다른 돼지들과 탄 눈꽃은 끝끝내 농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꽃만큼은 나의 회색 세계로 데려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오후 2시, 할아버지의 시골 농장과 충주 사이의 휴게소에 들렀다. 악취와 함께 돼지들이 낑겨 앉은 트럭을 떠나 휴게소로 간다. 오징어 구이, 고구마 말랑이 등 온갖 간식을 먹을 수 있지만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한다. 흔히 휴게소에서 돈까스를 먹지만 오늘만큼은 먹고 싶지 않다. 간단한 우동을 먹고 나와 담배를 피우며 멀찍이 나의 트럭을 본다. 다른 돼지들은 널브러져 있다. 그러나 눈꽃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오후 3시, 어딘가에서 전화가 왔다. 도살장 사장인 줄 알았더니 할아버지다.
“이보게, 정말 미안한데 자네 다시 우리 농장으로 올 수 있나? 눈꽃 새끼들이 어미랑 떨어진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너무 많이 울어. 힘들겠지만 부탁함세.”
할아버지의 음성을 들으며 나의 트럭으로 다가간다.
어느새 눈이 내린다. 악취가 나는 트럭에서 돼지들은 눈을 먹는다. 그러나 어딘가를 응시하던 눈꽃은 이내 나를 바라본다. 홀로 고고하게, 정면으로 나를 응시한다.
원래대로라면 4시까지 충주에 갈 수 있다. 농장에 다시 돌아간다면 아슬아슬하게 6시까지 간다.
“할아버지?”
나는 눈꽃을 눈의 고향으로 데려다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