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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녕 Dec 29. 2019

붙잡아야지, 잃어가던 것

2019년 생존기

“괜찮아?”


스무 살 때부터 친했던 친구와 반년 만에 만났을 때 들은 말이다. 지하철을 잘못 타는 바람에 많이 늦어서 미안했는데, 사람의 표정과 분위기를 잘 읽는 친구라 보자마자 그런 말을 하는 거 있지. 그동안의 근황들을 속사포처럼 읊었고, 잠잠히 듣던 친구가 한 마디 했다. 


“유녕아, 그거 네 잘못 아니야. 

스무 살 때부터 너를 보아온 나는 너가 대단한 걸 알고 잘 될 걸 알아. 

그런데 왜 그 모든 상황에서 자신이 없고 스스로 자책해.


눈물이 핑 돌았다. 


숨 쉬는 것보다 숨 막히는 게 익숙하고 또 미쳐 돌지



시간이 갈수록 담기보단 비우는 게

편하고 새겨내는 것보다는 지우는 게

편해져 그래 사라지는 게 두려워도

또 살아지는 게 무섭고 용기는

자꾸 더 어두운 쪽에서만 넘쳐나지


How I feel woo how I feel

이런 느낌 다 잘 알지

숨 쉬는 것보다 숨 막히는 게 익숙하고 또 미쳐 돌지

오롯이 날 내뱉고 싶어

아무 생각 없이

조용히 잠에 들고 싶어

내일 생각 없이



요즘 남자 이상형은 라비, 여자 이상형은 청하인데 두 사람의 콜라보 곡을 안 들을 리가. 노래도 좋고, 라비가 자신의 우울증을 고백한 곡이라 요즘 더 위안이 되기도 해. "죽기 좋은 날 같아 오늘 I just wanna die today"에서 "웃기 좋은 날 같아 I just wanna live today"로 바뀌는 전개도 참 좋아. 그런데 그 좋은 가사들 속에서 내가 꽂히는 건 다른 곳에 있잖아. 


숨 쉬는 것보다 숨 막히는 게 익숙하고 또 미쳐 돌지.


왜 괴로울 때마다 이 가사가 생각나는 건지 모르겠다. 올해가 많이 괴로운 해였어서 그런가 보다. 각오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외롭고 괴로웠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이상하게 요즘 연말 분위기가 잘 나지 않는다 했다. 나는 이상한 게 아니라고 했어. 우리의 어중간한 상황과 나이도 한몫 하지만, 다들 행복한 연말을 보낼만한 해는 아니었잖아. 


요즘 난 정확히 반쯤 죽어 있어




시간 지나 먼지 덮인 많은 기억
시간 지나면서 내 몸에 쌓인 독
자유롭고 싶은 게 전보다 훨씬 더 심해진 요즘 난 정확히 반쯤 죽어 있어



"만만치 않은 사람이 만만치 않은 일을 겪었네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욕지기가 올라오고 배가 아프고 두통이 와서 급하게 내과를 찾아갔을 때, 처음 진찰하던 의사 선생님이 한 말이다. 


"지금 아픈 원인으로 음식과 스트레스 중에 바로 후자 뽑잖아요. 그만큼 이런 상황에 많이 부딪혔다는 거고. 소화기관과 뇌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저는 배를 진찰하면 뇌의 상태도 들여다볼 수 있어요. 물론 내용은 몰라요. 그런데 지금 유녕 씨 머릿속은... 아휴, 아주 난리가 났어요. 잠은 잘 잔다고요? 에이, 아닐 걸? 지쳐서 잠들 수는 있겠지. 그런데 당신 같이 예민하고 속으로 삭히는 스타일은 남들에 비해 편히 잠은 못 자요."

"취직하면 나아질 거 같지? 미안하지만 더 심해질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여길 찾아오거든. 차라리 지금 와서 다행이기는 해요. 배는 안 아파요? 속은 부글거리죠. 이 정도면 평균이라고요? 유녕 씨, 남들은 이 정도면 많이 불편해해요. 이런 걸 견디며 사니까 본인이 아픈 줄도 모르잖아."

"유녕 씨, 보통 사람들은 링겔 750ml 맞을 정도로 아프면 여기 와요. 링겔 꽂고도 돌아다니고 회복해서 해맑게 나가요. 그런데 가끔 1000ml 넘게 꽂아도 자리에서 한 번도 안 일어나고 멍하니 누워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당신처럼. 그런 사람들은 750 정도의 고통은 그냥 넘겨버리는 거야.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가 죽겠다 싶어서 찾아오면 이런 상태라고. 막상 또 진료실에서 보면 잘 웃어요. 그런데 진짜로 웃는 것 같지가 않아. '이렇게라도 웃어야 살지'라는 심정으로 웃는 것 같아. 본인이 안 괜찮은 거는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죠?"


친구가 더럽게 좋은 명의를 추천해줬네. 

 



<독>은 웬만해서는 잘 듣지 않는 곡이다. 프라이머리와 이센스의 명곡이고, 한국 힙합을 대표하는 곡 중 하나이며, 가사 하나하나가 너무 좋고 날카로워서 싹 다 필사하고 싶지만 자주 듣지는 않는다. 아니, 못한다. 한참 힘든 시기를 보내고 나서 이센스가 낸 <독>은, MR을 최소로 하고 펜과 피아노 소리와 함께 이센스의 읊조리는 랩으로 진행된다. 가사만으로 충분한 힘을 가진 곡이라 가능한 구성이다. 이센스의 곡들, 특히 <독>을 듣고 싶어지는 날은 우울한 날이라고 했어. 심연이 있는 곡이라 그래. 거꾸로 말하면, 심연에 빠져보지 않은 자는 <독>에 공감할 수 없다. 나도 우울하다는 이유로 <독>을 마냥 싫어하고 싶은데. 고3 이후로 <독>을 이렇게 많이 들은 적이 없었는데. 그래서, <독>에 빠져 있다는 건 내가 심연 속에 있다는 증거야. 



 지금까지의 긴 여행
 꽉 쥔 주먹에 신념이 가진 것의 전부라 말한 시절엔
 겁먹고 낡아 버린 모두를 비웃었지
 반대로 그들은 날 겁 줬지
 나 역시 나중엔 그들같이 변할 거라고 어쩔 수 없이
 그러니 똑바로 쳐다보라던 현실
 그는 뛰고 싶어도 앉은 자리가 더 편하대
 매번 그렇게 나와 너한테 거짓말을 해

 


2019년은 아무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해로 기억할 것이다. 커리어만을 말하는 게 아니야. 가족이고 인간관계고 마음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누군가는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으로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내 맘대로 되나. 단순히 내가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해서 투정 부리는 게 아니야. 내가 자꾸 무언가를 잃어버려. 웃음을 잃고, 식욕을 잃고, 감정을 잃고, 내가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되었는지 이유를 자꾸 잊어버려. 대신 얻은 건… 두통과 욕지기와 2년 만에 도진 심장 통증으로 약을 달고 사는 아픈 몸, 그리고 누군가 툭 건들기만 해도 울 것 같은 심연이야.


그래서 반년 만에 10년 지기 친구와 만났을 때, 

친구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자리서 울었어. 

친구가 안아주는 순간, 사람 많은 카페에서 목 놓고 울어 버렸어. 

가족 앞에서도 풀 수 없는 긴장을 그 순간만큼은 놓아버리고 싶었으니까.



 그 담배 같은 위안 땜에 좀먹은 정신
 어른이 돼야 된다는 말 뒤에 숨겨진 건 최면일 뿐 절대 현명해 지고 있는 게 아냐
 안주하는 것뿐 줄에 묶여있는 개마냥
 배워가던 게 그런 것들뿐이라서
 용기 내는 것만큼 두려운 게 남들 눈이라서
 그 꼴들이 지겨워서 그냥 꺼지라 했지

 
 

뻔히 알면서도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기분이야. 

생각 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상처는 자꾸 받아. 예상한 상처는 괜찮아. 아프더라도 금방 아무니까.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처는 아픈 게 아니라 쓰리고 자꾸 덧나. 그런 상처는 자꾸 살을 파고들고 썩어 들어서 잘 잊지도 못해. 그래서 더 뭣 같고 화나. 


이 심연에서 벗어날지라도 천국이 기다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 

더한 것도 볼 수 있다는 걸 잘 알아.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아직 포기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해.



내 믿음이 이끄는 곳 그 곳이 바로 내 집이며 내가 완성되는 곳
기회란 것도 온다면 옆으로 치워놓은 꿈 때문에 텅 빈 껍데기뿐인 너 보단 나에게
마음껏 비웃어도 돼
날 걱정하는 듯 말하며 니 실패를 숨겨도 돼
다치기 싫은 마음뿐인 넌 가만히만 있어
그리고 그걸 상식이라 말하지
비겁함이 약이 되는 세상이지만

난 너 대신 흉터를 가진 모두에게 존경을 이겨낸 이에게 축복을
 

 

나만 힘들었던 건 아니야. 첫 대학원 학기와 인간관계 때문에 하반기에 쭉 7키로가 빠진 친구를 만났을 때, 우리 둘 다 안색이 영 아니었어. 찜닭을 먹으면서 친구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 있지. 


“유녕아, 우리 왜 이렇게 힘들까? 야,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봐. 난 너 걱정 안 해. 너도 그렇게 내 주변의 친구들도 그렇고 객관적으로 잘났거든. 나는 네 능력이면, 좀만 더 버티면 원하는 곳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너도 그렇고 다들 엄청 힘들어한다? 내가 그 이유를 생각해 봤어. 단순히 이 상황을 견뎌야 해서 힘들어하는 게 아니라 그래. 단순히 커리어를 얻고 싶어 하는 애들이 아니라, 그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다들 뭘 바꾸고 싶어 해서 힘들어하는 거야. 그런데 또 바꾸려면 그 부조리한 것들을 다 겪고 부딪혀야 하니까 힘들어하는 거야.


그렇게 말한 친구는 오늘 멕시코, 쿠바로 한 달 여행을 떠났다. 

부러운 놈. 나는 3박 4일 세부 여행을 다녀와도 이 지독한 우울감이 안 사라지던데 말이야. 



깊은 구멍에 빠진 적 있지
가족과 친구에겐 문제없이 사는 척
뒤섞이던 자기 혐오와 오만
거울에서 조차 날 쳐다보는 눈이 싫었어
열정의 고갈
어떤 누구보다 내가 싫어하던 그 짓들
그게 내 일이 된 후엔 죽어가는 느낌뿐
다른 건 제대로 느끼지 못해
뒤틀려버린 내 모습 봤지만 난 나를 죽이지 못해
그저 어딘가 먼 데로 가진 걸 다 갖다 버린대도
아깝지 않을 것 같던 그 때는
위로가 될만한 일들을 미친놈같이 뒤지고 지치며
평화는 나와 관계없는 일이었고
불안함 감추기 위해 목소리 높이며 자존심에 대한 얘기를 화내며 지껄이고 헤매었네 어지럽게
누가 내 옆에 있는지도 모르던 때

 
 

“취업 안 해도 돼. 괜찮아.”

엄마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만해도 괜찮다고, 왜 자꾸 입맛을 잃어버리느냐고 엄마가 그랬어. 

나는 평생 엄마의 트로피이자 감정 쓰레기통 아니었나. 지금도 그럴지도 모르고.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났으면 기뻐야 하는데,

왜 하나도 기쁘질 않아?



그 때도 난 신을 믿지 않았지만 망가진 날 믿을 수도 없어 한참을 갈피 못 잡았지
내 의식에 스며든 질기고 지독한 감기
몇 시간을 자던지 개운치 못한 아침
조바심과 압박감이 찌그러트려놓은 젊음
거품, 덫들, 기회 대신 오는 유혹들
그 모든 것의 정면에서 다시 처음부터

붙잡아야지 잃어가던 것
 
 

10년 지기 친구 앞에서 울면서 이야기했어.

난 이 과정이 너무 싫은데. 정말 싫고 불합리하고 힘들고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시험하는 것 같고 괴로운데.

너무나 역겨운데, 아직은 포기할 수 없다고.

아직도 내가 아끼는 무언가를 지독히 사랑해서 그른 것 같다고.

그러니…이 모든 아픔과 상처와 우울과 지금 함께 가더라도,

결국은 다 게워내고 지금 내가 잃어가는 모든 것들을 다시 붙잡아야겠다고. 



급히 따라가다 보면 어떤 게 나인지 잊어가 점점
급히 따라가다 보면 어떤 게 나인지 잊어가 점점
멈춰야겠으면 지금 멈춰
우린 중요한 것들을 너무 많이 놓쳐

급히 따라가다 보면 어떤 게 나인지 잊어가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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