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서펠의 ‘동물, 우리의 동반자’를 읽고)
진우는 요다를 위한 메뉴 개발에 열심이다. 오늘의 메뉴는 북어와 참치 요리. 진우는 미리 물에 담가 소금기 뺀 북어를 프라이팬에 달달 볶아 거기에 참치 캔을 섞은 뒤 깨끗한 접시에 옮겨 담았다. 어디든 요다가 있는 곳이 식탁이다. 진우는 요다 앞에 음식을 나른 뒤 접시를 먹기 편한 각도로 기울여 들고, 접시에 달라붙은 음식을 숟가락으로 떼 주면서 식사가 끝날 때까지 시중을 들었다. 누가 왔다 갔다 하면 불안해서 밥을 안 먹는다고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얘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정성을 들이는 거야?” 내가 보다 못해 물었다. “이걸 보고 얘기해.” 진우가 아빠 미소를 지으며 자고 있는 요다를 가리켰다. 자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과학자들은 우리 눈에 고양이가 그토록 귀엽게 보이는 건 고양이 얼굴이 사람 아기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둥근 얼굴, 넓은 이마, 큰 눈, 작은 코가 아기와 닮았다는 것이다. 고양이 얼굴이 아기와 닮았다고? 아기 눈이 동그랗다고 해도 고양이처럼 동그란 건 아니고 코는 모양이 너무 다르지 않나? 나의 의식이 둘의 차이를 분별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에도 나의 무의식은 대충의 유사성에 반응해 옥시토신을 내뿜는다. 그 결과 귀여워 죽겠는 기분에 휩싸여 고양이를 쓰다듬고 싶고 돌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요다가 자식이라는 말에 줄곧 저항해왔으나 나 역시 요다에게 이상하리만치 헌신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진우가 부르면 안 들리는 척하고 진우가 부탁하면 귀찮아서 안 할 때가 많은데, 요다가 부르면 열 일을 제치고 달려가게 되고 요다가 부탁하면 귀찮은 걸 이기고 하게 된다.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내가 본 다큐에서는 오목눈이 둥지가 타깃이 됐다. 제일 먼저 부화한 뻐꾸기 새끼는 다른 알들을 모두 둥지 밖으로 밀어 떨어뜨린 뒤 먹이를 달라고 입을 쩍 벌렸다. 주둥이 안쪽이 징그럽도록 선명한 오렌지색이었다. 사람 아기의 특징적인 모습이 사람의 모성애를 자극한다면 새끼 새 주둥이의 오렌지색은 오목눈이의 모성애를 자극한다고 한다. 선명한 오렌지색에 홀린 오목눈이 어미는 그 안에 먹이를 하나라도 더 넣어주고 싶은 마음에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먹이를 물어 날랐다.
그런데 뻐꾸기는 오목눈이와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 생김새와 깃털 색도 다르지만 무엇보다 몸집의 차이가 크다. 뻐꾸기 새끼는 갓 부화했을 때부터 오목눈이 새끼 보다 머리 하나가 크더니, 다 자라자 몸집이 오목눈이 어미의 서너 배나 됐다. 뻐꾸기가 오목눈이의 핏줄이 아니라는 건 누가 봐도 자명했다. 그런데 오목눈이 어미는 뻐꾸기가 둥지를 떠나기 직전까지 그 주둥이에 먹이를 물어 날랐다. 사람들은 오목눈이가 뻐꾸기를 제 새끼인 줄 알고 돌본다고 한다. 정말일까? 아닐 것 같다. 오목눈이 어미는 뻐꾸기가 제 새끼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알면서도 뻐꾸기에게 홀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것일 뿐.
사람은 아기의 특징적인 모습에 모성을 일으키도록 진화했다. 그것은 수 세대에 걸쳐 그 효용성이 입증된 효과적인 생존 전략이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있다. 우리는 제 자식만이 아니라 비슷한 특성을 가진 다른 것들, 생명체는 물론이고 인형 같은 물건에도 동일한 반응을 일으킨다. 에러가 발생한 것이다. 에러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에러는 그게 아니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만남으로 우리를 이끈다.
“얘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정성을 들이는 거야?” 내가 물으면 오목눈이 어미는 뻐꾸기 새끼를 가리키며 대답할 것이다. “이걸 보고 얘기해.” 그리고는 오렌지색 주둥이를 쫙 벌린 새끼를 바라보며 행복 가득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달리 무슨 대답이 필요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