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태국 여행 2018-2019 2화 양곤
다섯째 날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몸 스캔하기. 눈을 감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서대로 훑어 내려간다. 이때 어떤 감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을 일으키지 말고 그저 알아차리기만 한다. 고엔카는 자기 몸을 사물을 대하듯 객관적으로 대하라고, 아무 감정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다. 특정 감각에 대해 자동적으로 갈망이나 혐오를 일으키는 반응을 멈추라는 것이다.
고엔카는 말한다. 모든 감각은 중립적이다. 감각은 그 자체로 유쾌하거나 불쾌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감각은 특정 가치와 결합하면서 비로소 유쾌하거나 불쾌한 것이 된다. 원효의 해골물이 대표적인 예다. 같은 물인데, 밤에 바가지에 담긴 줄 알고 마셨을 때는 감로수처럼 달콤하다가 해가 뜨고 해골에 담긴 것인 줄 알게 되자 구토가 날만치 역겨워진다. 부드러운 손길도 그것이 연인의 것이라면 좋지만, 연쇄살인범의 것이라면 부드럽기에 더더욱 소름 끼칠 것이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정말 모든 감각이 중립적인가? 통증이나 가려움은 그 자체로 불쾌하여 누구라도 없애 버리고 싶어 하는, 결코 중립적일 수 없는 감각이 아닐까?
나는 평소 간지러운 감각이 일어나면 피가 나게 긁어서라도 그 감각을 없애려 든다. 그런데 그 감각을 반기게 되는 건 어이없으리만치 간단했다. 개똥을 약으로 알 듯 그걸 약으로 알기만 하면 됐다. 고엔카가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관찰하라고 하니까 무슨 감각이든 느껴야 할 것 같은데 대체로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개똥이 약이 된다고 하면 귀하게 보이는 것처럼 감각을 찾아다니다 보니 가려움이 다 반가워졌다. 통증도 마찬가지였다. 감각을 찾는 게 목적이 되니까 없애려고만 했던 통증이 반가웠다.
그러나 다리 통증만은 예외였다. 다리에는 감각 느끼기보다 상위의 가치가 적용됐기 때문이다. 건강이라는 가치. 실제로 매 순간 느껴지는 다리 통증은 그리 대수로운 수준이 아니다. 통증의 강도는 고관절이나 어깨가 더 컸지만, 나는 그 통증이 일시적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것들은 센터에서 나가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다리 통증은 달랐다. 그것은 일시적인 증상이 아니다. 다리에서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머릿속에서 지난 2년간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멈출 수 없었던 기억과 그것이 계속되는 한 앉아 생활하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란 예측이 마음을 어둡게 했다.
지난 2년간 다리에 통증을 몇 번이나 느꼈을까? 하루에 수십 번씩 수만 번에 이를 것이다. 나는 그 수만 번의 통증에 하나의 반응으로 일관했다. 실망과 좌절. 한순간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반응은 그렇게 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축적된다. 낫고 싶었기에 낫지 않는 다리가 고통스러웠고, 고통스러운 만큼 낫고자 하는 욕망은 커졌으며, 낫고자 하는 욕망이 커질수록 낫지 않는 다리가 더욱더 고통스러워졌다.
순간적이고 무의식적인 반응이 매 순간 반복되고 강렬해지면서 갈망과 혐오로 발전한 것, 이것이 집착이다. 잘 알려진 대로 집착은 모든 고통의 원인이다. 집착에서 벗어나는 게 가능할까? 놀랍게도 고엔카는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인 훈련법을 제시한다. 자기 몸을 사물을 보듯 객관적으로 관찰하라, 즉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을 일으키지 말고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라는 것이다.
개의 습관을 고치는 방법은 개가 하는 행동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다. 야단치는 것도 관심의 표현이라 개의 행동을 부추길 뿐이다. 개의 습관이 주인의 반응을 연료로 삼는다면, 감각에 집착하는 우리의 습관은 감정적 반응을 연료로 삼는다. 끝내 반응하지 않으면 개가 포기하고 차차 조르는 횟수가 줄어드는 것처럼 감각이 일어날 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으로 반응하기를 멈추면 오래된 마음의 습관은 그 연료를 공급받지 못해 차차 힘을 잃게 된다.
새벽부터 밤까지 앉아 쉬지 않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몸을 훑고 또 훑었다. 통증을 느낄 때마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직전의 과제였던 코 삼각형의 성공에 고무된 터라 자꾸 하다 보면 통증을 사물을 보듯 객관적으로 보게 될 거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그저 차분하게 낙관하는 정도에 머물렀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번 기회에 무언가를 경험해보겠다는 들뜬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기 처지에 안 맞게 무리를 한 건 그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섯째 날
여섯째 날의 과제는 1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기. 이 수행의 목적은 일부러 고통을 만들어내서 그 고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감각을 관찰하다 보면 어떤 감각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모든 감각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가려움이 영원히 지속되는 일이란 없으며, 통증도 마찬가지다.
한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건 그야말로 고행이다. 부처님처럼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멀고 아득한 목표만으론 한 시간 동안 안 움직이고 앉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를 버티게 한 건 옆에 있는 동료들이었다. 그들이 버티니까 나도 버텼고 그들보다 잘 하고 싶어서 좀 더 버텼다. 홀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하다가 한 시간이 지나자 수련생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스페인 여자가 나보다 먼저 다리를 풀었다. 어깨가 으쓱했다. 곧이어서 나도 다리를 폈다. 뒤꿈치가 찌릿찌릿했다.
그때만 멈추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또 한 시간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세 번째로 자리를 잡는데 무릎이 따끔따끔했다. 덜컥 겁이 나서 그제야 방석을 여러 개 가져다가 의자를 만들어 앉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일 년 동안 백번도 넘게 침을 맞아 겨우 사라졌던 아킬레스건 통증이 고스란히 돌아왔다. 삼 년 전 육 개월간 치료를 받았던 양쪽 무릎의 통증도 같이. 고엔카는 통증은 지나간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그건 성한 다리가 책상다리로 인해 일시적으로 아플 때 얘기지, 부상이 있는 내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판단했어야 했다.
방석을 높여 의자에 앉듯이 앉았는데도 발목과 무릎이 못 견디겠다고 비명을 질렀다. 방석의자가 낮아 무릎과 발목이 급하게 꺾이고 당겨졌기 때문이다. 그 정도 꺾이고 당기는 것도 못 견디는 다리를 엉덩이로 깔고 앉아 있었다니. 걷잡을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옆자리 방석까지 끌어다가 의자 높이를 제대로 높였다. 그 위에 앉으니 다리는 물론 허리와 어깨까지 다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이러면 되는 걸 뭣 때문에 몸을 망가뜨리는 짓을 했단 말인가.
담마홀에서 나와 걸으니 발을 내디딜 때마다 뒤꿈치에 통증이 있었다.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후회로 가슴이 쿵쿵 내려앉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다리 상태는 이러다 곧 낫는 게 아닐까 싶을 만치 호전됐었다. 다리가 묵묵히 내 무게를 버티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는 희망에 부풀었었다. 그런데 다리는 또다시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아슬아슬한 무엇이 되었다. 숙소까지 가면서 넘어질까 봐 겁이 났고, 계단을 보면 거기서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질까 봐 오금이 저렸다.
그날의 부상은 무릎과 발목에 그치지 않았다. 나는 그때까지 바지를 빨지 않고 두 개를 돌려 입고 있었는데, 제이는 매일 아침 옷을 갈아입고 점심에는 전날 입은 옷을 빨아 널었다. 제이가 더럽다고 흉보지 않을까 싶어 바지를 빨게 됐다. 그런데 바지가 크고 무겁다 보니 손목에 무리가 갔다. 남의 눈치 보느라 안 해도 되는 빨래를 하다가 손목을 다친 것이다.
비상용으로 가져간 뜸 기구를 꺼냈다. 양쪽 발목과 무릎, 오른쪽 손목 이렇게 다섯 군데에 뜸을 삼 회씩 총 15번을 떴다. 살이 타들어 갈 때마다 기분 나쁜 통증에 몸서리치면서 동시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렇게라도 잘못을 보상하고 있다는 만족감이었다.
일곱째 날
아침에 침대에 걸터앉아 발목 돌리기를 했다. 그런데 동작을 적극적으로 크게 하질 못하고 소극적으로 작게 하게 됐다. 동작을 크게 했다가 아픈 걸 확인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담마홀에 앉아 있으려니 발 여기저기서 통증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발목 통증은 통증이라기보다는 불편감에 가깝다. 그래서 위급한 인상을 안 주고, 이러다 말겠거니 하고 안이하게 대처하게 만든다. 발목 통증이 긴박한 호소력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이 원망스러웠다. 만약 그랬다면 초기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정말 이렇게 될 줄을 몰랐던 것일까? 그러나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나는 다리가 아픈 지난 2년간 여러 운동을 전전했고 그때마다 무리한 동작으로 다리를 망가뜨리고 후회하기를 반복했다. 다리 근육을 키운다고 헬스장에서 비싼 피티료까지 내가며 레그 프레스를 하다가 겨우 호전되고 있던 다리를 망가뜨렸고, 요가를 하면서 발목을 무리하게 꺾는 동작을 했다가 다치고, 다리가 나이질 만하면 다시 시도하고 다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 과정을 통해 내 다리가 꺾이거나 무게를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는 걸 매번 뼈아프게 확인했다. 그런데 몇 날 며칠을 하루 열 시간 넘게 다리를 꺾은 채 깔고 앉아 있으면서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고?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묵언의 규율을 깨서 벌어진 일이었다. 제이와 상의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바닥에 앉아서 버티지 않고 방석으로 의자를 만들어 앉았을 테고, 이 같은 사태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제이를 원망하는 마음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 덕분에 잠시 자책의 고통에서 놓여났으나, 가시방석을 피해 불가마에 들어가는 격으로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엎어진 물, 후회해도 원망해도 소용없다. 다리로 인해 명상까지 망친다면 바보짓에 바보짓을 더하는 것이니 명상에 집중하자고 애썼다. 그러나 몸 스캔을 하다가 다리에 이르면, 아니 다른 부위를 스캔하다가도 다리에 통증이 느껴지면 그때마다 감정이 격해져 엎드려 발을 부둥켜안고 쓰다듬었다. “발아 미안하다.” 몇 번이나 입 밖으로 소리 내 외칠 뻔했다.
여덟째 날
과거의 시행착오를 까맣게 잊은 채 양반다리로 앉아 있어도 괜찮을 줄 믿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제이의 말을 믿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나는 제이의 말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제이의 말을 믿었다면 그건 그렇게 믿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20대 중반에 친구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스트레칭이 효과가 있는 것 같아.”
내가 말했다. 그때도 나는 이미 어깨가 좋지 않았나 보다.
“왜 그렇게 생각해?”
친구가 물었다.
“동작할 때 아프더라고. 그럼 운동이 되는 거 맞잖아.”
친구가 어이없다며 웃었다.
운동할 때 강도를 평소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높게 해야 한다는 말을 주워들은 후로 나는 그 말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그 말에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그 말이 나의 기질에 맞았을 것이다. 나는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고, 고통을 그 한계가 극복되고 있다는 사인으로 이해했다. 젊은 시절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성이 게으르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여 무리가 될만한 활동을 하지 않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웬만한 활동을 감당할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전에는 아무 문제 없이 하던 활동들이 무리가 되기 시작하더니, 차차 앉고 걷고 눕고 일어나고 말하고 타이핑하는 거의 모든 일상적인 활동이 무리가 됐다. 이제 통증은 극복의 사인이 아니라 금지의 명령이 됐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변화를 일시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 했다. 약간만 몸이 좋아져도 상태가 회복된 것으로 여겨서 전에 하던 대로 하려고 들었고, 그때마다 부상이 뒤따랐다.
사실 담마홀에선 양반다리로 앉는 게 제일 쉬운 일이었다. 남들이 하는 대로 하면 그냥 하면 되지만, 다르게 하려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이유가 있다 해도 눈치를 봐야 하니까. 다리가 아프고부터 남들과 보조를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걸을 때 남들과 걷는 속도를 맞추기가 쉽지 않고, 계단을 오르기가 주저됐다. 그러나 내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어달라고 하거나 엘리베이터까지 돌아서 가자고 하기가 어려워 남들을 따라 빠르게 걷거나 계단을 걸어서 오르내렸고, 그러고 나면 반드시 다리가 아팠다.
요가를 하러 가서도 따라 할 수 없는 동작들이 많았다. 그럴 땐 혼자 가만히 있거나 다른 동작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기왕 거기까지 갔으니 강사가 하는 대로 다 따라 하고 싶은 욕심이 나기도 했지만, 모두 하나의 동작을 하는 동안 나만 다른 짓을 하는 게 여간 어색하고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었다. 무리가 될 줄 알면서도 따라 하다가 다리를 악화시키길 수도 없이 반복한 후에야 불편한 마음으로 버티는 쪽을 택하게 됐다. 불편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흐릿해지지 않았다. 혼자 다른 동작을 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 특히 강사의 시선이 따갑도록 신경이 쓰여서 속으로 내가 왜 강사를 안 따라 하고 다른 동작을 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는데 나 혼자 변명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자신을 설득해 의식적으로 변명하길 멈춰도 잠깐 정신을 놓고 있으면 또 혼자서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노라고 말 할 수 있는 친구’라는 카피의 광고가 있었다.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정연하게 줄을 맞춰 뒤돌아서 있을 때, 혼자 앞을 보고 있는 유호성의 미소 위로 그 카피가 흐른다. 그 광고를 보며 생각했다.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노라고 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나는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노라고 말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다. 오히려 노라고 말하고 싶어도 분위기를 봐서 적당히 입을 다무는 스킬이 필요할 정도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외부의 시선 같은 건 크게 신경 안 쓰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요가학원이나 센터에서의 나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내가 모두가 예스라고 말할 때 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건, 외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나에게 노라고 말하길 요구하는 외부의 시선에 부응해서가 아니었을까? 나는 늘 주변부, 그것도 예술계에 속해 있었기에 주위에서 내게 요구하는 것은 모두와 똑같은 태도가 아니라 다른 태도였고, 나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아채고 거기에 부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노라고 말하면서 나는 예스라고 말할 때만큼이나 외부의 시선에 부응하려고 필사적이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