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앙스포 교환학생 일기 #2
어디서든 사람이 가장 중요하구나.
아에로플로트는 악명 높은 항공사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에로플로트에 대한 편견도, 러시아 사람들에 대한 편견도 오늘 다 깨졌다.
직항이 편할 때도 있지만 나는 한 번에 오랜 비행을 하면 너무 힘들어서 경유를 선호한다. 또 한 군데를 여행할 때 두 군데를 여행한 듯한 느낌을 주니까 일석이조라고도 생각한다. (물론 경유 시간이 너무 긴 건 힘들더라) 오늘 파리를 가는 길에는 모스크바에서 경유를 했다. 모스크바, 러시아에 대해 나는 ‘무서운 나라’, ‘차갑고 냉철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악명 높은 아에로플로트 항공사도 불친절하고 서비스도 별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이미지를 애초에 왜 갖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정확한 이유를 대기는 힘들다. 비교정치 시간에 러시아 사람들의 정치적 특성 등에 대해 배우며 갖게 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모스크바 경유를 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소통한 모든 사람들은 그 편견을 다 깨주기에 충분했다. 짐을 부칠 때의 항공사 직원은 수하물이 2kg 정도 제한을 넘자 눈을 찡긋하며 돌아올 때 조심하라고 말씀하셨고 (이래도 되는지, 보통 이렇게 해주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눈 찡긋의 센스가 넘쳤다) 스튜어디스도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친절한 멘트를 남겨주었다. 그리고 비행기 안에 마련된 키트에는 슬리퍼와 수면안대가 있었다. 짐을 올리고 내릴 때는 뒷사람이 도와주었고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옆에 이미 와 있던 승객은 내 자리 위의 키트, 담요, 쿠션 등을 잠시 치워주었다. 이 과정에서 이미 편견은 싹 사라져 있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좋은 사람은 사람은 여행지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뿐만 아니라 인상을 좋게 만들어준다. 비행시간 중 7시간 반은 정신없이 잔 것 같은데 마지막 1시간 30분 동안 옆 사람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것은 즐거운 기억이다. 특별했던 이유는, 나는 러시아어를 전혀 못하고 옆 사람은 영어를 거의 못하는 러시아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언어의 장벽을 온몸으로 느낀 채 1시간 30분 동안의 나름의 소통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그 사람은 28살 배를 모는 사람이라는 점, 배를 몰고 서울에 왔다가 비행기를 타고 돌아간다는 점, 모스크바에 산다는 점, 영어를 잘 못한다는 점과 인스타그램 아이디 정도. 말도 안 통했지만 따뜻한 친절은 내가 모스크바를 여행하고 싶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물론 아직도 러시아는 내게 무서운 여행지이지만, 이런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밖에 못 나가는 것이야 당연 아쉽지만 공항 안을 둘러 다니면서도 충분히 그 나라의 문화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것 같다. 이태원에 있는 러시아 음식점을 한 번 가본 적이 있는데 세레메티예보 공항에서는 그때 본 음식들을 파는 음식점들도 보고 상당히 많이 싼 양주와 보드카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책에서만 보던 러시아에 많은 나무도 공항에서 구경할 수 있었고 정말 어색한 러시아 언어를 조금이라도 구경(?)하는 재미는 쏠쏠했다. 그리고 러시아에 한 달 정도 살았던 친구가 추천해준 블린이라는 팬케이크를 찾으려고 좀 돌아다녔는데 찾진 못했지만 그래도 러시아에서 유명한 음식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조차 흥미로웠다. 너무 사소한 것까지 신기해하는 건가.
위에까지는 경유지에서 느낀 점이었다. 경유지에서 파리에 오면서 ‘역시 악명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구나’ 싶은 일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를 타자마자 푹 잠들었다. 정말 깊은 잠에 들어 있었는데 옆에 있던 학생 같은 사람이 나를 살짝 건드려 깨웠다. 갑자기 비행기에서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다 도착한 건가 싶을 정도로 상황 파악도 안 됐고,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도 잘 안되었다. ‘비행기를 바꿔 타라는 건가...’ 생각을 하며 비행기에서 내려 게이트로 돌아갔다. 나 대신 다른 사람들이 문의하는 것을 넘겨 들은 결과 게이트의 직원들이 info desk로 가라고 했다. 위 층으로 가서 info desk를 찾았는데 또 앞의 사람들이 이미 문의하는 것을 들은 결과 게이트로 돌아가라고 했다. 게이트에 돌아가서 다시 문의하자 다른 직원이 달려오면서 28번 게이트로 또 움직이라고 했고 거대한 인파는 함께 비행기에 다시 올랐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비행기가 다시 출발하기까지는 2시간 30분 정도가 걸렸고 짐이 무거워 힘들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힘들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앞서 아에로플로트와 사람들에 대한 인상이 너무 좋아서였을까, 별로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냥 또 하나의 추억, 또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나는 또 잽싸게 잠이 들었다. 일어났을 때쯤 아침이 나오고 있었는데, 원래 기내식을 잘 안 먹는 탓에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아침 옵션 중에 팬케이크가 있었고 이가 앞서 친구가 말해준 블린인 것 같았다. 그렇게 아침을 받아서 맛봤는데 정말 만족스러웠다. 팬케이크는 물론, 디저트로 나온 러시안 초콜릿과 요구르트는 짧은 시간 동안 러시아를 톡톡히 경험하게 해주는 데 충분했다. 러시아에 꼭 가고 싶어 졌다. 이제 교환학생 여정은 막 시작했음에도 오늘 하루만 해도 언어의 장벽을 뼈저리게 느낀 경험이 두 가지나 있었고 차가운 러시아의 공기와 시원한 파리의 여름 공기를 모두 느꼈으며 벌써 마음이 좀 여유로워졌다. 아직 몸은 쉬지 못해 여유롭지 못하지만 이제 푹 자면 되겠지. 오랜 여정 끝에 파리에 안전히 도착하고 숙소를 찾아온 스스로를 칭찬하며! 푹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