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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Jan 27. 2022

기어이 그놈을 만났다

'절대 나는 아닐 거야'. 그 오만방자한 자신감은 어디서 왔던 것일까. 프랑스 오미크론 일일 확진자가 40만 명을 넘어서고 있고. 회사에서도 한 번도 걸리지 않은 동료들을 생존자라 칭할 만큼 사무실 절반 이상이 최근 감염 물결을 타고 있지만. 나만은 쏟아 내리는 빗물 사이를 요리조리 잘 피해 갈 수 있을 거라. 근거 없는, 아니 어처구니없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면역력이 떨어지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몸을 혹사시켰다.


이틀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데드라인이 가까워지면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도 새벽 내내 잠들지 못하고 내일, 모레 그리고 그다음 날.. 해야 하는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나하나 세기 시작하자 걱정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딸려져 왔다. 눈을 뜰 때마다 시계가 멈춘 듯 시간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한 시. 두 시. 세 시... 밤이 이토록 길게 느껴질 수 없었다. 결국 이불 밖으로 나와 다시 일을 했다.


내가 멈춘다고 세상이 멈추는 것도 아닌데. 멈출 줄 모르고 조금만 더를 외치던 나를 멈춘 건 코로나였다. 이년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놈을 기어이 만나게 된 것이다. 이놈이 정확히 언제 내 몸을 침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뭇 기분 나쁜 뭔가가 몸 전체를 감싸는 느낌을 받았다.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잠을 못 자서 그런 걸 거야. 재택근무를 하며 호전되기를 바랐지만 웬걸.


목은 점점 따끔해졌고. 기침은 잦아졌다.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고. 두드려 맞은 듯 몸이 쑤셨다. 감기가 걸렸나. 차라리 감기였으면 싶었지만. 뭔가가 달랐다. 오미크론의 증상이 일반 감기 증상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어왔고, 실제로 증상만 봤을 때는 감기와 큰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몸 안을 감도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이 감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설마 하는 마음으로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갔다.


검사 후 삼십 분이 지났을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상냥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였다. "방금 전에 코로나 검사받으셨죠?" "네"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왔어요." 가슴이 철렁했다. 드디어 올 게 오고 말았구나. “백신 다 맞으셨죠?" "네. 백신 2차 접종에다 부스터 샷까지 맞았어요." "지금부터 다음 주 목요일까지 격리하시면 돼요. 마스크나 젤은 충분히 있으신가요?"


여자는 받은 매뉴얼대로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다정함이 묻어 있어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됐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이것 때문에 하는 일에 지장이 있으면 어떡하지. 재택근무를 하면 돼서 큰 지장은 없겠지만 몸보다는 일 걱정이 앞섰다.


코로나 확진 소식을 전하자 모두 잘 쉬라고 했지만 결과를 받은 그날도 일을 해야만 했다. 몸은 쉬어달라고 아우성인데 미룰 수 없는 일들을 최대한 빨리 끝낸다는 게 저녁 아홉 시가 돼서 끝났다. 어리석은 정신승리였다. 무슨 부귀와 영화를 본다고. 다행히 금요일 저녁이었고. 주말만큼은 일하지 않고 푹 쉬기로 결심했다. 후각과 미각까지 잃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몸을 챙겨야 했다.


그렇게 하루의 소란과 코로나 소식으로 놀랐던 마음이 진정되자 코로나에 대해 그토록 자신했던 게 황당하고 부끄러워졌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회사에서 '지금처럼 중요한 일이 있고 바쁠 때는 몸이 알아서 아프지 않아'라고 동료들에게 떵떵거리던 무식함과 내 몸에 대한 철저한 무례함을 떠올리자 걸려도 싸지 싶었다. 어쩌면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온 이곳에서 이 년 가까이 여태껏 걸리지 않고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아프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한식이었다. 코로나로 한 달이 넘도록 후각과 미각을 못 찾은 동료가 있었기에 코로나를 걸린다고 상상했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은 '맛'을 상실하는 일이었다. 혀와 코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지금. 치료제도 없는 코로나로부터 큰 후유증 없이 최대한 빨리 빠져나오는 법은 몸이 잘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고. 이럴 때 묘약은 음식이었다.


계란찜이 먹고 싶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종종 해주던 계란찜이 떠올랐다. 호빵처럼 동그랗게 부풀어 올라서 호호 불어가며 먹던 그 부드럽고 노오란 계란찜. 별다른 반찬 없어도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었고 속까지 뜨끈하게 데워지곤 했다. 레시피를 찾아 따라 해 봤지만. 고대하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계란찜 대신 터진 풍선처럼 여기저기 찢어지고 김 빠진 계란찜이 완성되었다.


마침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엄마가 어렸을 때 해주던 계란찜이 떠올라서 해 먹었어"라고 하자 엄마는 되려 놀라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그런 것도 해줬니?" 엄마가 기억을 못 하는 게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엄마는 어린 딸 둘을 두고 가정의 생계를 혼자 책임지느라 요리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엄마가 해준 요리라고는 떡볶이, 김치찌개, 계란찜 정도밖에 기억이 안 나는데 갑자기 계란찜이 그렇게 먹고 싶었던 것이다. 문득 지금 내 삶의 무게도 가끔은 견디기 힘든데, 엄마는 그 무거운 삶의 무게를 홀로 어떻게 견뎠을까 싶었다. 그러자 마음이 그때 계란찜처럼 동그랗고 뜨겁게 부풀어 올랐다.


실패했지만 그럭저럭 먹을만했던 계란찜을 먹고 나니 더욱 간절해지는 음식이 있었다. 바로 김치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운 휜 쌀밥에 김치를 한 점 얹어 먹을 수만 있다면. 코로나 따위는 멱살을 잡아 몸 밖으로 쫓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코로나에 걸리면 입맛이 사라진다는데,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김치가 간절하고 절실했다. 타지 생활을 한다는 게 몸이 아플 때면 유달리 서럽게 다가오는데. 아플 때 당장 김치를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서러움을 곱절로 만들었다.


그때 마침 요리사인 한국 지인분에게 연락이 왔다. 코로나에 걸려서 격리 중이라며 푸념하듯 말했다. "몸이 아프니 김치 생각이 너무 나더라고요.." 그녀는 반색하며 말했다. "어머~ 복도 있으시다. 딱 어젯밤에 김치 담았어요. 이따 가지고 갈게요." "아 정말이요??? 너무 감사합니다".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춤이라도 출 수 있을 정도로 신나고 기쁜데, 그분의 그다음 말이 더 감동이었다.


“빨리 낫게 해 드릴게요. 너무 기쁘네요."


그날 저녁에 집 밖에 가져다주신 음식을 보니 한 번에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음식들이 있었다. '아니 이게 다 뭐야' 하나하나씩 꺼내 보면서 놀라움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입이 한없이 찢어지고 있었다. 어제 담그셨다는 김치도 크게 한 통이 왔고 해물 순두부찌개부터 직접 만드신 콩비지, 콩비지 전, 멸치볶음에다 고추절임까지.. 말 그대로 잔치였다. 전화로 연거푸 고맙다고 하자 그분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맛있게 먹고 빨리 나으세요. 이럴 때는 먹고 싶다고 말하는 거예요."


김치를 먹으면서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워낙에 음식에 마음과 정성을 쏟고 재료를 전혀 아끼지 않는 분이라 어디 가서 구하기 힘든 김치였다. 이런 김치를 먹는데 코로나 제 놈이 과연 내 몸 안에서 버티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가볍게 밥 두 공기를 후딱 비우자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편안한 마음이 들으면서 자신감도 생겼다.


‘코로나, 기어이 너를 만나고 말았지만. 너는 아직 나의 입맛을 빼앗지는 못했다. 그러니 곧 너를 곧 이겨내고야 말 것이다!’


전 세계와 우리의 삶을 단기간에 정지시켰고. 이년 가까이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코로나가 내 안에 있다니 이상하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존재가 생각보다 약하면서 동시에 강하니 말이다. 걸리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지배하던 초반의 강력한 코로나는 아니지만. 종종 들리는 말처럼 가벼운 감기 또한 결코 아니다. 이놈과의 지독한 동거가 앞으로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놈을 몸에서 쫓아낼 때까지는 매끼 김치를 얹어 밥을 두 공기씩 먹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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