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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Nov 13. 2018

사랑을 할 줄 아는가?  

The Art of Loving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평소에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내가 얼마 전에 우연히 본 미스터 션샤인에 푹 빠졌었다. 미스터 션샤인에는 주옥 같은 대사들이 많은데 특히 애신과 유진이 러브를 말하는 장면은 나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을 설레이게 했다.


"러브가 쉬운 줄 알았는데 꽤 어렵구려"


"힘들면 그만해도 되는데"


"그만하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으니 오늘은 하지 맙니다. 오늘은 걷던 쪽으로 한걸음 더"


러브가 쉬운 줄 알았다고 말하는 애신은 사랑이 언제든 원하면 그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귀여운(?) 착각 또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사랑을 하며 점차 깨닫게 된다. 사랑은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지난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사랑의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프롬은 위와 같이 단언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사랑이라는 항해를 시작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난파하고 만다. 그렇다면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말기에 우리는 처음부터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는 사랑은 애당초 포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사랑의 경우, 포기는 불가능하므로,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 것 같다. 곧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


한국에서 '기술'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는 'The Art of Loving'이라는 영문 제목처럼 기술보다는 아트의 첫 번째 의미인 예술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결국 또 다른 의미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랑이라는 분야의 진정한 예술가가 될 때까지 끊임없는 배움과 노력의 과정은 필수이다. 하지만 프롬은 현대인들이 이 배움과 노력을 하지 않아 많은 사랑이 결국에는 실패로 끝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노력을 하지 않는 이유를 사랑을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닌 '사랑받는' 문제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기술한다. 사랑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무지한 혹은 오만한 현대인은 심지어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대상을 찾는 게 어려운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사랑에 이토록 실패하면서도 사랑의 기술 혹은 예술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프롬은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 이외의 다른 것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데 있다고 한다.


사랑을 뿌리 깊이 갈망하면서도 사랑 이외의 거의 모든 일, 곧 성공, 위신, 돈, 권력이 사랑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




나 또한 오랫동안 사랑을 찾아 방황했고, 또 여러 번의 실패를 거친 후에야 남편과의 지금의 사랑이 가능했다. 그전까지 사랑을 그토록 갈구하면서 매번 실패로 끝났던 건 프롬의 말대로 사랑을 하는 것보다 받는 것에 더 집착했었기 때문이다.


매번 ‘내가 사랑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한 번도 ‘나는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는 정작 돌아보지 못했다. 철저하게 이기적이었던 것이다. 이성이 나에게 주는 사랑에 대해서 늘 부족하다고 불평하며 ‘더, 더!’를 외쳤다. 그리고 그 마음 한가운데는, 정작 내가 나 자신에게 주지 못하는 사랑의 결핍을 타인을 통해 채우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나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기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중


우리는 종종 이기심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착각하지만, 자기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에 대해 결코 이기적일 수 없다. 사랑은 한 분야에만 국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한 분야가 비록 자기 자신일 지라도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롬은 정작 자기 자신은 사랑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만 사랑하는 것 또한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왜냐면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는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롬은 진정 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사랑하며 나아가 다른 타인과 전 인류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사랑은 '대상'과의 관계를 넘어서서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

너무나도 멋진 말이 아닌가? 모든 사랑이 결국에는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전 인류에 대한 사랑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건 프롬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이 '받는' 수동적인 감정이 아닌 '주는' 능동적인 활동이며, 대상이 아닌 능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결국 영혼의 힘인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들이 그렇듯 진정 소중한 것들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사랑은 어떻겠는가.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하며 그 어느 것보다 큰 용기와 믿음을 요구한다.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갈등을 회피하지 않으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해서 프롬은 단호하게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결코 휴식처가 아니라고. 오히려 끝나지 않는 뜨거운 도전이라고.


사랑은 끊임없는 도전이다. 그것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곳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


진정한 사랑은 스스로 그리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며, 다른 재화와는 달리 우리 모두에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공평하게 주어진 기회이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는가? 프롬은 우리 대부분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비록 우리는 종종 그것을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착각할지라도 말이다.


모든 것이 동등 가치로 교환되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계나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사랑처럼 주는 만큼 받는다는 확신을 가지기 어려운 분야도 없기에 경제 활동의 관점으로만 보면 투자 리스크가 지나치게 크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기에 오늘날 많은 이들이 어느 만큼 줘야 손해보지 않을지를 미리 계산하며 사랑을 하거나 혹은 사랑하는 것 자체를 단념해 버린다. 이건 어쩌면 우리에게 용기가 부족해서 일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사랑받고 사랑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쓸 수 있으며 고통과 실망조차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용기, 절망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 그런 용기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 대부분이 사랑의 용기는 없어도 절망의 용기는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절망의 용기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단념하게 하거나 혹은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도망가게 한다.


프롬은 절망의 용기가 사랑의 용기의 반대라고 한다. 사랑의 용기는 다시 말해 희망의 용기이기도 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희망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을 뜻한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

하지만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아무런 보증이 없는 이런 희망에 온전히 스스로를 맡길 수 있는가? 손해 보는 건 아닐까? 내가 바보는 아닌가? 이런 계산과 망설임 사이에서 결국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현대인들이 결국은 진정한 사랑을 택하지 않는 이유를 프롬은 믿음의 부족에서 보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다름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이 믿음을 가질 용기가 있어야만 우리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믿음을 '신앙'이라고 부르고 있다. 종교적 신앙이 아닌 합리적인 신앙 말이다. 문득 아주 오래전에 고등학교 때 만났던 첫사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를 믿어. 그게 아니면 느껴지는 그대로를 믿는 것도 좋겠지. 나도 내 마음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그때 나는 믿음을 갖지 못했고 우리는 결국 헤어졌다. 그 이후로 십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랑의 실패' 끝에야 나는 조금이나마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런 사람이 된 후에야 지금의 남편과 진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 밖의 일상에서 다른 여러 사람 그리고 다양한 선택과 맞닥뜨렸을 때 여전히 사랑과 절망의 용기 중 무엇을 선택할지 망설이는 나를 보고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나는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인가?




The Art of Lo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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