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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vu letar Feb 07. 2023

내가 어쩌다 99살이 되었나 (1)

내 할아버지는 99살이다.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늙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그 연세에도 김치를 담그고 재봉틀을 돌리고 식사를 직접 차리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까지 돌본다. 그리고, 여전히 아침마다 부동산 뉴스를 챙겨본다.


아빠는 매주 할아버지 할머니 댁엘 가서 찾아뵙는데,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손수 막내의 밥을 차린다.


지난주엔 아빠가 할아버지의 맑은 뼈해장국 레시피를 받아왔으니, 무슨 할 말이 더 있을까.



얼마 전엔 어이없게도- 할아버지가 임플란트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거 괜찮은 치과 좀 알아보라고. 그 말씀에 가족들은 물론 말렸고 치과 의사는 당연히 더 말렸다. 지혈이 안될 수 있으니 위험하다고.


할아버지는 그만큼, 아직도 씹을 것이 많고 씹고 싶으신 것이 많다는 뜻이겠지.

 




할아버지가 내게 해준 옛날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생각할수록 기묘해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한국전쟁 당시, 경기도의 외진 마을에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피란을 가고 몇 가구 안 남아있었는데 그 얼마 남지 않은 중에 할아버지도 껴있었다.


그러던 어느 새벽- 북한군이 마을로 들어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불알친구를 찾아 불러 세웠다.


 이 동네에 남성 동무라곤 둘 밖에 안 남았서. 한 동무는 이 동네를 지켜야 갔고, 한 동무는 나를 따라나서야 갔어. 어느 동무가 남을지 정하라우.


그의 말에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친구는 시간을 지체해 가며 멀뚱멀뚱 서로 쳐다보기만 했고, 그런 그들을 번갈아보던 북한군은 날래 정하라우! 하며 채근했다. 그럼에도 불구,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없이 오들오들 떨기만 하고 서 있는 걸 기다리고 있자니 답답했던지, 북한군은 두 할아버지에게 '짱 깸 뽀'를 시켰단다. 조건은 단판.


목숨을 건 가위 바위 보라니.


할아버지가 묵을 내고, 친구 할아버지가 가위를 냈을 때-


친구 할아버지는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저 놈이 늦게 냈어요.


그러자 북한군은,


 그렇디. 동무가 조금 늦긴 했디.


아닌데 자비심을 발휘한 북한군은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고.

그러나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묵으로 동무를 이겨버렸으니.


이후 다시는 그 친구를 볼 수 없었다.


그때 그 일이 아니었으면 아빠도, 나도 태어날 수 없었을 거라고.






할아버지는 패션에도 민감해서 그 옛날에 맞춰놓은 정장도 멋스럽게 소화해 내는데, 지난 명절에 만났을 땐 할아버지가 입고 있는 재킷이 탐나서 한 번 입어보고 소매도 걷어보고 했다. 딱 요즘 동묘에 가서 제대로 건진 매니쉬 핏이었다.


 할아버지. 이거 너무 예쁘다. 갈 때 벗어주고 가.


그러자 사촌언니가


 할아버지가 어딜 가는데?


하고 씩 웃는 게 아닌가. 느닷없는 저승개그에 나는 입을 오므리고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라는 단어에는 잘못하면 '인자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도 있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인자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다. 어제도 큰 집 식구들에게 한바탕 소리를 질렀으니까.


큰아버지가 길을 가다가- 어르신들이 소리를 크게 틀어 가지고 다니며, 오도바이도 타고 걷기도 하는 그 요상한 물건. 일명 '효도 라디오'를 주워, 할아버지한테 내밀었단다. 이거 들으시라고.


할아버지는 그 물건을 보자마자 열불이 치밀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큰 아버지는 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머지 형제들에 비해 너무나 치우치는 재산을 물려받았으니까.


큰아버지는 워낙 생각이 많지 않으니, 단지 길을 걷다 할아버지가 생각났을 뿐. 별 의미가 없었을 거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 의미 없다는 의미 조차 미워보이는 거겠지.


할아버지는 그 누추한 물건을 보고선,


 누굴 그지로 아나. 이 상놈의 새끼. 호로 같은 새끼. 내 이이 이, 어떤 노인네가 뒈지고 버린 물건을 나한테 들이밀어? 이 망할 놈의 새끼. 저 놈이 양, 전에는 지 어멈 모시고 병원 다녀온 돈을 내가 줬더니. 20만 원 인가. 그걸 내밀었더니 양, 홀라당 들구 가. 저 상놈의 새끼.


 큰 애미 너는. 왜 나헌테 말두 읎이 내 그릇을 홀라당 다 새것으로 바꿨니? 응? 그릇들이 아주 양, 새 거라 미끄덩 거려서 양. 괜히 저거 설거지 허다가 깨버리믄 할멈 다치구 응? 그럼 저 눔이 할멈 가지구 병원 갔다가 나헌테 돈 달라구 허것지. 응? 내 그릇 도루 갖구 와라.


내가 어쩌다 99살이 되었나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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