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 사랑한다는 것에 관하여
From 1919 to 2022
지수의 얼굴이 밝았다. 여전히 눈을 뜨면 오늘은 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지긋지긋한 항암치료를 더 이상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지수는 암이 재발한다고 해도 다시는 이런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치를 떨었지만, 그것도 부질없는 망상이었다. 주삿바늘 한 번에도 온몸이 불타오르고 위액까지 게워내는 인간의 몸뚱이는 비루할 것도 없이 초라했지만, 자르고 베어 내도 살아내고 마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였다.
김교수는 지수의 웃음이 많이 흐뭇했다.
“의학이란 게 참 아이러니 해요. 과학은 같은 조건의 같은 결과가 있어야 하는데, 의학은 그렇지가 않거든요. 그걸 사람들은 기적이라고도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의지 위에 있는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섭리가 있는 것 같아요. 그 무언가의 알 수 없는 의미 같은 … 사실 수술 중에도 이게 과연 최선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지수 씨가 버텨내니까 내가 이제 아버님 볼낯이 생겼습니다”
지수는 입원 중에 만난 어느 청년을 생각했다.
“제가 계산해 보니까 그랬어요. 석 달이요. 지금 두 발로 서 있기만 한다면 최악의 상태라고 해도 죽기까지는 최소한 평균 석 달은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전 매일 오늘부터 석 달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매일 시작되는 석 달이 생기던데요”
항암치료 말기에 너무 아파서 병원 복도에서 난간을 붙잡고 기절하기 직전의 지수를 부축해 주었던 청년이었다. 암병동에서는 지수도 젊은 편이었는데 그 청년은 아예 어렸다. 어찌 저 어린 사람이 여기에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는 고통 속에서 이미 성숙해 있었다. 간병하던 그의 엄마는 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슴을 쥐어뜯었으나, 서로 마주 보는 데서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고통이 오면 아들은 입을 닫았고, 엄마는 눈을 감았다.
지수가 퇴원할 때에도 그 청년은 병원에서 나오지 못했다. 지수보다 훨씬 더 오래 병원에 있었지만 어린 청년의 집으로 가는 길은 막연했다. 그는 떠나는 지수에게 함박웃음을 지었고 그 웃음에 울음이 터진 것은 오히려 지수였다. 지수가 울자 그의 엄마가 지수를 잡고 울었다. 그는 창피하다며 두 여자를 쫓아내듯 뒤돌아 섰지만 그의 뒷모습은 아리고 아렸다.
지수가 집으로 돌아오자 태길은 더 이상 서희의 손님이 아니었고, 수진이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태길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결혼은 안 될 것 같아요. 수진 아빠 때문만은 아니에요. 사실 자신이 없어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기력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태길이 씩 하고 멋쩍게 웃었다.
“나 그렇게 둔한 사람 아닙니다. 지수씬 가끔 내 직업이 뭔지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이미 각오하고 생각했던 일입니다"
"종기가 떠나던 날 장례식장에서 표정 없이 앉아 있는 지수 씨를 보고는 그 뒤로부터 나한테 이상한 게 생겼었어요"
"꿈에서 자꾸 어떤 여인이 다가오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가버리는 거예요. 꿈에서 그 여인이 돌아서고 나서 깨어나면 그날은 하루종일 이유도 없이 가슴이 아팠어요"
"그러다 지수 씨를 다시 만난 거예요. 처음엔 그저 신기하고 반가웠을 뿐이었는데, 점점 지수 씨에게 다가가다가 어느 날 그 꿈속의 여인이 내게서 사라진 것을 알게 됐죠"
"지금도 꿈속의 여인이 지수 씨인지는 확신이 없어요. 하지만 지수 씨를 마음에 둔 후 더 이상 그 꿈을 꾸지 않게 된 건 분명해요"
"지수 씨는 내게 꿈이에요. 나는 지금 지수 씨의 꿈을 꾸고 있는 겁니다. 이 꿈이 지수씨에게도 아름답기를 원해요. 그렇게 애쓸 겁니다. 앞으로 남게 될 우리의 시간이 지극히 평범하고 온유하기를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면서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우린 이미 서로의 흔적이 되었으니 나는 여기서 뭘 더 바라지 않습니다. 지수 씨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아껴요. 부디 당신과 나의 시간이 더 이상은 애처롭지 않은 사랑으로 하루하루의 흔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린 정말 긴 시간을 돌아서 만났잖아요. 내겐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꼭 지금처럼만 사랑하면서 살아요. 사랑합니다. 내가 지킬게요. 그 안에서 평온하고 평범하게 살아요. 우리 그렇게 늙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