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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보 Nov 17. 2022

슬픔을 더하기 하는 일상

11월이 시작되고 지금까지 벌써 장례식장만 네 곳을 다녀왔다.


슬픔은 나누는 것이라는 평소 인생철학이 있어 잔치집에는 안 가도 초상집에는 꼭 가는 편이다.


어제는 함께 일하는 분의 형님께서 급작스레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듣고 대전까지 차를 몰고 갔다.


고인께 절을 올리고, 상주들과 인사를 마치고 늘 그렇듯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화장실을 가려고 나오는 중 바로 맞은편 식장 안에, 너무도 이쁘게 생긴 아이가 초상화 액자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다시 돌아오는 내내 난 내 방문 목적과 달리 자꾸 그 천진난만한 천사 같은 어린아이의 초상화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 든, 젊은 청년이든, 노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누구에게나 죽음에 관하여는 순서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좀 더 잘해 주었더라면", "좀 더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었더라면", "좀 더 얼굴도 자주 보러 가고", "좀 더 함께 하는 시간도 많이 갖었더라면", "너무 심하게 꾸짖지 않았더라면" ,.... 더라면,..... 더라면...


아마도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죽음 앞에 숙연해지고, 고통스러워하고, 후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지난날의 행동에 대하여 후회하고, 슬퍼하며 고통받는 이유는 그 사람에 대해 기쁨을 더하기보다는, 슬픔을 더해 왔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1년 전 이모님의 영정 사진에서 내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던 적이 있었다.


아직 87세라는 고령의 나이로 생 전하고 계시나, 내 어머니의 언니이신 1년 전 그때의 이모님의 영정 사진은 내 어머니의 모습과 너무도 닮은 모습이었고, 그 영정 사진을 본 나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결코 연습할 수도 없는 일이다. 


지금 내가 87세나 되신 어머니가 언젠가는, 아니 어쩌면 불과 몇 년 안에 내 곁을 떠나실 수도 있다는 것조차도 생각할 수 없듯이, 그렇게 죽음을 망각하며 사는 것이 어쩌면 현명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그 순서는 정해지지 않는다! 는 너무도 명료한 현실에서 아주 조금은, 그래도 아주 조금은 죽음이란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현실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경각심 만이라도 가지면서 사는 것이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슬픔을 더하기 하기보다는 기쁨을 더 하기 할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많이 갖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부디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이 천국에서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하느님께 진심으로 기도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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