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에 시달리는 젊은 청년들을 위하여..
가끔 뉴스를 스치듯 지나가는 짧은 기사들이 마음에 못을 박는다. 경제에 주름살이 늘어가는 만큼, 20·30대 젊은 얼굴들이 “부채”라는 단어 아래 눈을 감고 있다는 이야기다. 한밤중 화려한 도심은 여전히 밝지만, 어느 옥상 난간에서는 작은 숨소리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숫자를 믿어야 하는 세상에서 숫자에 짓눌리는 사람들을 생각하곤 한다. 직업적인 이유도 있지만, 철학적이기도 하고, 젊은 청년 둘을 아들로 두고 있는 아버지이기도 하고... 또 내가 겪은 일이기도 해서이다. 내야 할 이자, 밀린 카드값, 보증금 대출 만기일이 달력 위에 촘촘히 적혀 있을 때, 그 칸칸이 빨간 잉크로 번져 들어 공포로 변한다. “내일 아침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으면 어떡하지?” 이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다 보면,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는 듯한 절망이 밀려온다.
우리는 파산과 개인회생 같은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막상 그 문을 두드리기란 쉽지 않다. ‘도망치는 것 아닐까?’ ‘평생 낙인이 찍히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게다가 “열심히만 하면 언젠가 갚을 수 있다” 는 사회적 압박은, 어쩌면 이미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는 또 다른 돌덩이를 얹는 것일 수 있다.
돈이란, 있으면 편리하지만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듯한 기묘한 힘을 쥐고 있다. 인류가 종이와 동전을 발명한 날부터, 그 가치를 위해 목숨까지 저울에 올려놓는 비극이 함께 태어났다. 이 아이러니를 떠올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가진 것과 내가 ‘있는 그대로’의 가치는 과연 같은 저울 위에 올려도 되는 걸까?”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숫자를 상대로 혼자 싸우지 않을 용기다. 카드 명세서보다 먼저 친구에게, 가족에게, 혹은 가까운 상담 창구에 SOS를 보내는 일. 법원이 정한 회생 절차는 도망이 아니라 재출발을 위한 제도라는 점을 서로 일깨워 주는 일. 무엇보다, 누군가의 번뜩이던 가능성이 빚 때문에 꺼져 버리지 않도록 깊은 밤에 손을 내밀어 주는 일.
자신을 덮칠 듯한 채무를 바라보며 한계점이라는 탁자를 뒤엎고자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숨이 막히면 잠시 벤치에 앉아 도움을 청해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그 사람의 혀끝을 막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해는 다시 뜬다. 어제 빚의 무게로 구부러진 등이 오늘 아침엔 조금 펴지도록, 우리는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 크게 알려야 한다. 그리고 제도만큼이나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닌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빚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삶의 가격표를 돈이 매길 수 없음을.
혹 지금 이 글이 고단한 숨을 토해 내며 통장 잔액을 걱정하는 누군가에게 닿기를. 그리고 그가, 혹은 그녀가, 숫자 뒤에 숨은 자신의 이름과 가능성을 다시 한번 불러내기를. 우리는 돈 때문에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아직도 스스로를 증명할 수많은 빛나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