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하다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paperback에 끼인 연필 밑줄을 따라가다 보면, 늘 같은 장면에서 숨이 막힌다.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 빵 하나를 훔친 장발장에게 내려진 징역 5년, 그리고 네 번의 탈옥 시도로 불어난 19년 형. 그 가혹한 숫자는 “죄와 벌의 균형”이라는 정의의 저울이 얼마나 쉽게 기울 수 있는지, 지금도 날 선 경고음을 울린다.
나는 종종 묻는다. ‘과연 처벌은 항상 죄에 비례하는가?’ 법정 밖에서 이 물음은 더 적막하다. 불법 사설 대부업 체납으로 구속된 노인, 전철 무임승차로 실형을 선고받은 노숙인, 반면 수십 억 원대 횡령에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화이트칼라 범죄자를 떠올리면, 장발장의 그림자는 21세기 법정 벽에도 또렷하다. 법 앞의 평등이 활자에서 현실로 옮겨올 때, 자산·학력·사회적 네트워크가 형량을 흔드는 순간, 우리는 장발장 시대와 얼마나 달라졌나 생각하게 된다.
‘비례성’은 형벌 체계의 최소한이라고 배웠다. 가해 행위의 무게와 형벌의 무게가 조응(照應) 해야 한다는 상식. 하지만 현실은 종종 배고픈 사람의 가벼운 손보다 배부른 사람의 무거운 주머니를 보호한다. 법률 조항이 문제가 아니라 적용 과정에서 스며드는 차별, 변호인을 구하지 못해 서류 한 장도 제대로 못 낸 피고인, 보석금이 생활비의 수십 배라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빈곤층 등 장발장 신드롬은 이렇게 되살아난다.
위고는 장발장에게 죄를 면제해 주지 않았다. 대신 ‘과도한 대가’가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고 사회를 불신으로 물들이는지 보여주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도 그가 저지른 범죄가 아닌, 그 범죄에 부당하게 매겨진 가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처벌이 응보를 넘어 교정과 사회 복귀를 목표로 한다면, 비례성과 평등성은 이상이 아니라 설계의 마지노선이어야 한다.
문장을 덮고 나면 다시 현실이다. 거리에서, 법원에서, 기사 한 줄 속에서 새로운 장발장을 만난다. 나는 다시 묻는다. 우리는 법이 지닌 칼날의 정확성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칼날이 가장 약한 살을 베지 않도록 손잡이를 조정할 용기가 우리에게 있을까.
'레 미제라블'의 끝에서 장발장은 자기 이름으로 먼저 타인을 구하는 사람이 된다. 한 인간의 회복이 가능했듯, 제도도 회복 가능하다고 믿는다. 작은 죄의 삼중, 사중의 대가를 막아 내는 일. 가지고, 힘 있는 자의 거대한 범죄가 미세한 솜방망이로 끝나지 않게 하는 일. 그 균형추를 붙드는 일이 우리가 빚진 숙제다. 장발장이 남긴 질문은 여전히 간단하다.
“정의란 누구의 무게를 더 들어 올려야 하는가?”
나는 그 질문을 오늘도 책장 한복판에 세워 두고, 답할 준비가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