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SAFE 투자계약(조건부지분인수계약)에 관하여
지난 글에서 설명 드렸듯 미국에서는 초기 단계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의 형태로 SAFE를 택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반면, 우리는 2020. 8. 벤처투자법에 도입된 이후 정착되고 있는 단계입니다. 이에 이 글에서는 한국에 도입된 SAFE, “조건부지분인수계약”에 대해 설명 드리려 합니다.
* SAFE의 작동방식에 대해서는 이전 글(https://brunch.co.kr/@lawmission/67)에서 설명 드렸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벤처투자 촉진에 관한 법률(“벤처투자법”)은 2020. 8. “조건부지분인수계약”을 도입하였는데요, 벤처투자법의 적용을 받으면 세제혜택 등의 이익이 있고, 무엇보다 신주발행에 대해서는 상법이나 특별법의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이 대법원의 태도이기 때문에 SAFE를 벤처투자법에 포함시킨 것입니다(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벤처투자법은 “투자금액의 상환만기일이 없고 이자가 발생하지 아니하는 계약으로서 중소벤처기업부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충족하는 조건부지분인수계약을 통한 지분 인수”를 투자의 형태로 도입하였고, 벤처투자법 시행규칙(위 중소벤처기업부령)은 조건부지분인수계약의 요건을
① 투자금액이 먼저 지급된 후 후속 투자에서 결정된 기업가치 평가와 연동하여 지분이 확정될 것
② 조건부지분인수계약에 따른 투자를 받는 회사가 조건부지분인수계약의 당사자가 되고, 그 계약에 대해 주주 전원의 동의를 받을 것
③ 조건부지분인수계약을 통해 투자를 받은 회사가 자본 변동을 가져오거나 가져올 수 있는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조건부지분인수계약이 체결된 사실을 해당 계약의 상대방에게 문서로 고지할 것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①요건의 경우 조건부지분인수계약의 정의를 규정한 요건이고, ②와 ③요건의 경우 SAFE는 주식도 채권도 아니고, SAFE 권리자는 주주명부나 등기부에 드러나지 않는 권리자임에도 추후 지분의 변동을 예정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 주주 전원의 동의를 받게 하는 한편 추후에 주주가 될 자들에게도 본 계약의 존재를 문서로 고지하게 한 것입니다.
*본 문단은, 조건부지분인수계약에 대해 잘 정리된 최근 논문인 성희활, “조건부지분인수계약(SAFE)의 법적문제 – 유가증권법정주의를 중심으로-"를 참고하였습니다.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벤처투자법의 적용을 받으면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는 등 장점이 있기 때문에 요건을 충족시키는 형태로 투자계약을 체결하려고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투자자들이 자기 돈으로 회사에 투자하는데 왜 입법자는 굳이 이러한 요건을 법으로 규정했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드실 수 있는데요(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건 ‘유가증권법정주의’라는 녀석 때문입니다. 유가증권법정주의는 쉽게 말해 법적 근거가 없으면 주식과 같은 유가증권을 발행할 수 없다는 것이고, 좀 더 자세히 풀자면 주식과 같이 재산권적 가치를 가지고 자유롭게 유통되는 유가증권은 그 중요성을 감안하여 당사자의 의사만으로는 자유롭게 발행할 수 없고 법령에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유가증권법정주의는 법으로 정해져 있는 대원칙이 아닙니다. 유가증권법정주의에 대해서 정부당국이나 고시나 지침, 유권해석 등으로 정부의 입장을 명확하게 표명한 것 또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법령에 없는 새로운 수단으로 자금을 조달할 때마다 금융당국은 법에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새로운 유가증권의 등장을 막으며 유가증권법정주의를 간접적으로 표명해왔고, 유가증권법정주의에 대한 학설도 갈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유가증권법정주의에 대해 대법원이 중요한 판결(대법원 2007. 2. 22. 선고 2005다73020 판결)을 내림으로써 신주발행에 대한 법적근거가 필요하다는 점이 사실상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위 판결의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기로 하고, 주요 내용만 말씀드리자면 위 판결은 “신주의 발행과 관련하여 특별법에서 달리 정한 경우를 제외하고 신주의 발행은 상법이 정하는 방법 및 절차에 의하여만 가능하다”고 전제하고 상법이 정한 방법과 절차에 의하지 않은 전환권 부여조항이 효력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우리 대법원은 유가증권법정주의를 인정한 것이지요.
이와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명시적 법적 근거 없이 신주발행을 강제할 수 있는 계약이 체결된 경우, 그 계약의 내용을 소송을 통해 강제할 수 없고, 더 실무적으로는 신주발행 등기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즉, 계약을 체결할 수는 있지만 그 이행을 현실적으로 강제할 수는 없는 그런 상황인 것이지요.
결국, 조건부지분인수계약의 벤처투자법 도입은 회사의 신주발행을 강제할 수 있는 새로운 계약형태의 법적 근거라고 봐도 좋습니다. 다만, 여전히 조건부지분인수계약의 법적인 불확실성은 존재합니다. 일단 조건부지분인수계약의 법적 성격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상황이고, 회계상으로도 조건부지분인수계약에 의한 투자금을 자본으로 계상할 것인지 부채로 계상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은 앞으로 조건부지분인수계약의 정착과 그에 따른 분쟁, 판례의 태도에 따라 차츰 형성되어 나갈 것입니다.
유가증권법정주의와 관련하여 Convertible Note(CN)에 대해서도 설명드리고자 하는데요, 미국VC가 초기 기업의 가치평가 시점을 지연시키는 창의적인 계약을 형태를 만든 것은 원래 CN이 SAFE보다 먼저입니다.
CN은 가치평가 시점을 후속투자시점으로 미루되 만기가 있고 이자도 지급받으며 후속투자시점에 신주를 발행 받게 되는데요(벤처투자법에서 보셨듯, SAFE는 투자금액의 상환만기일이 없고 이자가 발생하지 아니하는 계약이라는 점에서 다르지요), CN 또한 회사에 신주발행을 강제할 수 있는 권리를 규정하는 계약이기 때문에 유가증권법정주의가 적용되고, CN은 여전히 대한민국 상법이나 특별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참고로 우리 상법에는 CN과 유사한 전환사채(Convertible Bond, CB)가 있습니다. 전환사채는 ‘사채’로서 만기가 있고 이자도 지급받지만 주식으로도 전환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전환사채는 주식으로 전환되는 가격을 명시하여야 한 반면, CN은 애초에 전환가격 자체가 후속투자에 따라 미래에 결정된다는 점에서 다르지요.
CN의 취지를 CB로 구현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전환사채의 경우 전환가액의 조정 조항(리픽싱)을 규정하여 추후에 특정 요건이 충족될 경우 전환가액이 조정될 수 있도록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리픽싱을 후속투자의 주식 평가와 연계시켜서 규정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미국 VC들이 CN으로 투자할 때 CB의 형태로 투자하면서 전환가격의 조정 조건을 규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CB를 발행하려면 정관도 변경해야 하고, 변경등기를 통해 공시하여야 하는 등 귀찮은 절차를 거쳐야 하고, 무엇보다 (나중에 변경되더라도) 일단 전환가액을 설정해두어야 하기 때문에 그 전환가액을 얼마로 할 것인지 가치평가를 거쳐야 하는 점에서 초기 스타트업 밸류에이션을 간소화하고 신속한 투자를 집행하고자 하는 CN의 취지에 어긋나는 면이 있습니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CN은 여전히 대한민국 법제도에 규정이 없으므로 법적으로 강제될 수 있는 권리는 아닙니다.
오늘은 원래 쓰려고 했던 글보다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벤처투자법상 조건부지분인수계약 조항만 설명드리려고 했는데, TMI가 되어 버려서 지루하셨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