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첫 임차인이 되었던 때는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고시원 생활을 했을 때로 기억합니다.
당시 기숙사 보수공사 문제로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 있는 고시원에 3달 정도 살았는데, 창문이 없는 방을 월세 27만 원에 살았습니다. 좁은 방이지만 TV도 있고, 냉장고도 있었습니다. 식당에 라면도 있어서, 라면으로 끼니를 자주 해결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법적으로 보면, 고시원에서 사는 것도 단기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고 사는 것입니다. 임대차보증금 없이 매월 임차료만 지급하고, 해당 호실을 사용하는 임대차 계약이 성립하는 것이지요. 환기도, 난방도, 방음도 조금씩 부족해서, 나중에 성공(?)하면 창문이 있는(?)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후 복학을 하면서 일반적인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고 원룸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는 경영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임대차 계약에 관한 법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부동산 중개인 없이 임대인과 저 둘이서 임대차 계약서를 체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의 임대인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면 나름 괜찮았던 임대인이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첫 원룸에서는 큰 문제없이 잘 살았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원룸 임대차 계약은 제가 베트남 회계법인 인턴십을 다녀온 후에 체결하였습니다. 두 번째 원룸의 임대인은 아주 독특한 분이었습니다. 제가 무슨 요리를 해 먹는지, 제가 언제 외출하고 언제 들어오는지를 다 알고 계신 독특한 할머니였습니다. "판옵티콘"이 어떤 사회인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임대차계약을 종료하고 보증금의 일부(20만 원)를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원룸의 일부를 파손하였기 때문에, 그 파손 비용을 공제하고 나머지 금액만 돌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억울했습니다. 아주 깨끗하게 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저 스스로 파손한 것은 없었는데, 임대인의 "갑질"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세 번째 원룸은 첫 직장 법무법인 바른에 취업하면서 얻은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의 원룸이었습니다. 대명중학교 옆에 있던 원룸촌에 원룸을 계약하였고, 회사와는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때의 임대인은 제가 변호사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지 특별히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임대차 보증금도 전액 돌려받을 수 있었고, 원룸 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수리 비용은 임대인이 직접 부담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자주 연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대인에게 연락하는 것은 늘 어색하고 불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짧게 혹은 길게 임차인의 삶을 살았거나 또는 임차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임차인"이라고 하면 뭔가 부족한 느낌, "임대인"이라고 하면 뭔가 부유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임차인"과 "임대인"은 참 가깝고도 먼 관계인 것 같기도 합니다. 오로지 필요에 의해서 연락하는 사이이지만, 그 필요의 정도가 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 엮여 있는 관계라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임차인은 서러울 때가 있고, 임대인은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임대차 계약은 대부분 유쾌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다시 네 번째 임차인이 되었습니다.
지난 9월 저는 다시 네 번째 임차인이 되었습니다.
세종시 집현동에서 새롬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다시 임대차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꽤 오랜만에 다시 임차인이 되면서, 스스로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임대인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자."
변호사 생활을 10년 넘게 하면서, 느낀 것은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는 필요 이상으로 너무 사무적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임대인과 임차인이 호형호제하면서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시점에 부담 없이 연락할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임차인에게도 그리고 임대인에게도 좋다는 것을 변호사 업무를 하면서 많이 느꼈습니다.
임대인의 집에 살면서 수리할 것이 종종 발생합니다. 대부분의 임대차 계약상 임차인 자비로 수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임대인이 수리 비용을 부담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임대인이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연락하지 않으면, 임대인이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완벽한 "남"인 사람에게 불쑥 연락해서 "수리해 달라", "비용을 달라"라고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법적으로 접근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저는 그래서 임대차계약을 체결하는 당일, 임대인에게 정중하게 인사드리고 제 명함을 드리면서 제 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임대인의 매물 덕분에 제때 이사를 올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의 소개를 받은 임대인도 자기소개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전직 공무원이었고, 기관장까지 하신 분이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연락을 드릴 때 '서장님'으로 불러드려도 되겠습니까?"
임대인께서 가장 높은 직위에 있었을 때의 직함을 불러드리면, 조금 더 원만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도 좋은 호칭이지만, 임대인이 원하시는 '서장님'으로 불러드리는 것만으로 첫인상이 좋게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무원 선배님의 좋은 기운을 받아서, 저희 가족도 즐겁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건넸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지 않겠습니까.
임대인은 임차인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잔금을 제때 지급할 것인지, 임대목적물(집)을 깨끗하게 사용할 것인지, 계약한 내용을 제대로 지킬 것인지 등등 임대인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임차인 입장에서는 임대인의 의심과 우려를 조금 누그러뜨려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임대차계약을 체결하는 당일에 임차인이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을 어필할 필요가 있습니다. 임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슬기로운 임차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임대차계약을 체결하는 날, 우리는 계약서 체결에만 매몰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중요한 것은 임차인과 임대인 사이에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사무적인 차원의 신뢰감"을 형성할 수 있다면, 남은 임대차 기간 동안 임차인은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임차인은 임대인에게 연락하기 어렵지 않고, 임대인도 임차인의 연락이 황당하거나 불편하지 않습니다.
"제 집처럼 아껴 쓰고 다시 돌려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9월 초 임대인의 아파트에 이사를 마무리하고 임대인에게 보낸 메시지입니다. 제가 입주한 임대인의 아파트에는 이미 기존의 임차인들의 흔적이 꽤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꽤 험하게 쓴 흔적도 있었고, 제가 임대인의 입장이더라도 마음이 아플 흔적도 꽤 있었습니다.
임차인의 마음까지도 아파오는 흔적
임대인이 아파트를 깨끗하게 써달라고 당부하는 그 취지가 진심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임대인의 우려를 이해하고, 임차인으로서 임대목적물을 잘 관리해서 사용하겠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법적으로 보아도 그것은 임차인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이사 온 지 한 달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편안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임대인에게 간단히 안부 카톡을 보냈습니다.
이사 온 지 한 달이 지났고, 특별한 문제없이 편안히 잘 지내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임대인이라면 자신 소유의 부동산에 애착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임차인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임대인 입장에서는 대단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한 것을 대단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지난 한 달 동안 큰 문제없이 산 것처럼, 앞으로도 큰 문제없이 살 것이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는 일종의 시그널링이기도 합니다. 법적으로 보면 임대인의 아파트 덕분이기도 하니, 그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임대인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불필요한 우려, 불필요한 의심을 없애고, 필요한 만큼의 신뢰관계를 쌓은 것 같아서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마지막이 되길 바라는) 임차인 생활을 슬기롭게 잘 마무리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