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채희 _ 해무

관계결벽증 08

by 김라얀


강채희는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이다.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밝고 유쾌한 말투로 불편한 공기를 먼저 알아채 웃음으로 눙쳤다. 감정을 곧잘 표현했고, 사소한 일상에도 잘 웃었으며, 말 한마디로 분위기를 유연하게 바꾸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학교든 직장이든 그녀를 미워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했다. 단정한 말투와 조용한 웃음, 적당한 거리감은 누구에게든 편안함을 주었고, 그래서 그녀 곁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그녀는 누군가를 흠잡는 말을 한 적이 없고,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였다. 그녀는 어디서든 환영받는 오래된 친구 같았다.




그러나 채희와 가까운 사람들은 가끔 그녀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그녀는 친절했고, 다정했지만, 이상하리만치 누군가에게 집중하는 기색은 없었다. 함께 있는 순간은 즐거웠지만, 그녀의 마음이 어디쯤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깝다고 느낀 찰나, 어느 틈에 거리를 두는 듯했고, 감정이 깊어질 듯하면 조심스럽게 선을 그었다.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녀는 아무도 깊이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감정은 오래 남기지 않았고, 추억은 쉽게 흐릿해졌다. 그래서 채희는 모두와 가까웠지만, 누구와도 진심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모든 추억과 소중한 순간들이 금세 잊혔다. 그렇기에 그녀는 모두와 가까웠지만, 누구와도 깊어지지 않았다. 사랑했던 사람도, 아꼈던 친구도, 이내 희미해졌다. 감정이 오래 남지 않으니, 상처도 오래 남지 않았고 그래서 누군가가 그녀에게 상처를 줬는지도, 그녀 스스로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채희는 바다를 좋아했는데, 특히나 해가 뜨기 전, 안개가 밀려오는 새벽 바다를 유독 좋아했다.

바다는 존재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 출렁이는 파도마저 해무가 덮어버리는 그 시간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평온해졌다. 해가 뜨기 직전, 어둠을 가르며 희뿌연 안개가 밀려오는 그 순간이 좋았고 그때의 바다는 출렁이는 파도마저도 해무가 조용히 덮어주었다. 그녀는 그런 새벽 바다처럼 평온하고 잔잔하게 모든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이 좋았다.

해무 속에서는 모든 게 멀어졌고, 조용해졌다. 안개는 격한 감정을 덮었고, 기억을 흐리게 했으며, 이내 무엇이 기쁨이었고, 무엇이 슬픔이었는지도 모르게 만들었다. 해무는 고요하고,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기에 거기서 오는 평온함은 사랑도 미움도 격하게 느끼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아무리 큰 파도가 몰려와도, 안개는 그것을 삼켜버렸고 두려움도, 기대도, 슬픔도, 기쁨도 모두 그 안에서는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런 채희에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의 잔잔한 바다를 거세게 흔들어 놓았다.
자상하고 따뜻했던 아버지는 채희가 포근함을 느끼는 가정의 중심이었고, 꿈꾸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그렇게 요동치는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있어서 아버지란 존재는 그녀의 잔잔한 바다를 거칠게 만들게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렸다. 아침까지 다정하게 배웅하며 저녁에 보자 인사를 나눴던 아버지가 어느 날 저녁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무엇에 깊이 빠지지는 것을 일부러 피했다.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면, 그것이 사라질 때 감당할 수 없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기에 감정에 젖는 것이 곧 상실의 전조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사랑의 감정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려 했다.


채희는 늘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으며, 그런 든든하고 책임감 있는 남자를 좋아할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실제로 그런 든든하고 다정한 남자를 만났을 때 망설임 없이 결혼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와의 삶은 아무 감정의 파동도 없었다. 다정한 말, 안정된 생활, 보장된 관계 속에서도 그녀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사랑도, 욕망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와 함께 했던 소중한 순간들도 그녀 머릿속에서는 금방 사라졌고, 그런 그녀의 망각을 서운하게 느끼는 남편의 오해를 풀어줄 수도 없었다.


오히려 이토록 완벽한 남자를 만나 놓고도 그 어떤 감정도 전해지지 않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 같았다.

어느덧 채희는 깨달았다. 자신이 남자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여자에게 끌린다는 사실은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만큼이나 가족과 세상, 그리고 그 남편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끝끝내 바깥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랑이 아닌 역할로, 감정이 아닌 책임으로 하루를 살아갔고, 남편에게 설명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서운함을 넘어서 분노와 무기력까지 느끼게 된 남편은 결국 이혼을 요구했고, 그녀는 그마저도 어떤 격한 감정의 동요 없이 받아들였다.




이혼 이후 채희 안의 해무는 점점 짙어져 갔다.

해무는 그녀를 지켜주는 방어막이자 감정을 가두는 투명한 감옥이 되었다. 아버지를 잃고, 자신을 잃고, 사랑의 감각마저 잃어버린 그녀는 이제 무엇에도 요동치지 않았고, 그 어떤 욕망이든 모두 해무 속에 던져버렸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 안의 안갯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채희 또한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오래전에 그만두었고, 그녀의 깊은 마음은 짙은 안개가 덮여 가끔이나마 출렁이는 파도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그렇게 감정이 사라진 흐릿한 고요 속에 가라앉았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아무도 닿을 수 없는 차가운 해무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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