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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yers Feb 13. 2022

파리의 오후, 남의 집 산책

라로슈의 집 Maison La Roche

누구나 한 번쯤은 살고 싶은 집을 상상해 보았을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집을 떠올리겠지만, 상상 속의 그 집은 대개 아파트는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허클베리 핀처럼 나무 위의 오두막을 가지고 싶었다. 물론 지금은 달라졌다. 작은 마당과 옥상이 있고, 아름다운 전망을 가진 창도 필요하다. 아담한 침실과 책을 많이 꽂을 수 있는 환한 서재, 차를 마실 수 있는 오붓한 공간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현실에서는 아파트 베란다의 화분도 말려 죽이는 형편이지만, 조그만 텃밭도 가꿔보고 싶다. 언젠가는 건축가 남편이 그런 집을 지어줄 거라 막연한 꿈을 꾼다. 어쩌면 그가 짓고 싶은 집과 내가 살고 싶은 집은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기대하게 되는 상상 속의 집이다.


상상 속의 집은 아니지만, 지금도 가족이 모이고 비바람을 피하게 해주며, 웃고 우는 우리집이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공간, 크든 작든 하루를 쉬게 해 줄 방과 집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누구나 집에 대해서만은 한 마디씩 거들 수 있다. 그래서 남의 집 구경은 재밌다. 아파트가 똑같이 생겼다고들 하지만 닮은 듯 다르게 각양각색의 사는 모습도 재미있고, 가족의 이야기가 입혀져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지게 되는 것도 재미있다.

 

그렇지만 집은 개인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초대받지 않으면 함부로 들여다볼 수가 없다. 건축기행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사유재산인 곳은 제아무리 유명한 건축물이라 해도 밖에서 기웃거리기만 할 뿐이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구경한 집은 바로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작품인 라로슈의 집(Maison La Roche. 1925)이다. 라로슈의 집은 파리에서 고급 주택가로 알려진 16구에 있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동네라 잠깐이지만 산책하는 맛이 있었다.

 

이런 동네다


그런데 라로슈의 집 입구는 꼭꼭 숨어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다른 집들은 입구가 도로 쪽으로 나 있는데, 라로슈의 집은 다른 건물들 사이로 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야 한다. 차도 들어갈 수 있으니 아주 좁은 건 아니지만, 다른 집과는 다른 구조인 데다가 가로수 때문인지 입구가 잘 안보였다. 꽤 길게 이어진 골목길에는 키가 큰 가로수가 늘어서 있어 시원하고 기분 좋았다. 골목길 끝에는 주변의 다른 집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생긴 아담한 하얀 집이 기다리고 있다.

 

그땐 참 튀었을 것 같은 하얀 집


 이곳에는 집이 두 채 있다. 르코르뷔지에의 형인 잔느레 가족의 집과 라로슈의 집이 맞닿아 있는 것이다. 잔느레 가족의 집은 지금은 르코르뷔지에 재단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어 관람을 할 수 없다. 라로슈의 집은 르코르뷔지에의 박물관처럼 쓰이는 듯했다. 필로티가 있는 ㄱ자 모양의 왼쪽 집이 오늘 구경할 라로슈의 집이다.

 


두 집을 함께 지었기 때문에 이곳을 라로슈-잔느레의 집(Maisons La Roche-Jeanneret)이라고 합쳐서 부르기도 한다. 똑같이 생긴 두 개의 철문 사이로 두 집이 나누어진다. 다른 집들로 빙 둘러싸여 있어서 건물 전체를 한 앵글에 담기 힘들다.

 

입구에 들어서면 3층까지 뻥 뚫린 공간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입장권을 구입하고 파란 비닐덧신을 신어야 한다. 바닥이 흰색 타일이라 상할까 봐 그런 건지,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을 보러 여러 군데 갔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신발까지 무장시킨 곳은 없었다.

 

까만 문이 현관이고, 의자 두 개는 비닐덧신을 신기 위해 앉으라고 둔 것이다


정신없이 덧신을 신고 비로소 고개를 들어 집을 둘러본다. 로비층은 천장이 높은 홀이다. 입구 오른쪽에는 가방과 외투를 보관하는 곳이 있는데, 원래 집사의 방이었다고 한다. 집사의 방 안쪽으로는 부엌이 있다.

 

집사의 방. 이곳의 벽과 문은 아무래도 전시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새로 칠한 것 같다


로비홀의 오른쪽과 왼쪽 끝에는 각각 계단이 있다. 그렇지만 모두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향한다. 왼쪽 계단 입구가 좀 더 열려있기 때문인 것 같다. 왼쪽 2층은 발코니가 살짝 마중 나와 있어서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로비의 공간이 아주 넓은 건 아니라서 정면의 벽 전체를 담기가 힘들었다

 

왼쪽 계단의 모습. 오른쪽 계단보다 폭이 넓다


왼쪽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간다. 튀어나온 곳은 발코니가 맞았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니 아마도 손님을 맞이할 때, 입구 쪽을 내려다보며 “자네 왔나?”하고 반겨주는 자리인 것 같았다. 발코니에서 바라보면 몇 가지가 더 눈에 들어오는데, 현관문 머리 위로 복도가 지나가고 있었다. 복도 옆은 창으로 채워놓았다. 이 창이 집 전체에 환한 자연광을 끌어들인다. 그 빛이 닿는 곳은 전혀 어둡게 느껴지지 않았다.

 


2층의 홀에 놓인 르코르뷔지에 작품의 모형을 지나면 필로티 위에 있는 커다란 곡선벽을 가진 방이 나온다. 이곳은 갤러리다. 높은 천장, 하얀 벽, 길게 가로로 난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갤러리를 완성한다. 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곳이 미술품을 전시하기 위한 갤러리라니, 집주인이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 집의 주인이었던 라로슈는 스위스 출신의 은행가였다고 한다. 그는 미술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는데 자신의 수집품을 전시하기 위해 집에 갤러리를 만든 것이다.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와 작품을 즐기기 위한 집을 만든 셈이다.


갤러리는 그 모습 자체로도 예술작품 같다. 3층으로 길게 이어지는 경사로, 창문 아래 벽을 향해 설치한 길다란 조명, 벽에서 수직으로 뻗어 나온 알전구, 가운데에 놓여있는 검은 테이블까지 하나하나가 작품의 요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양쪽으로 낸 길고 큰 창도 이곳이 그림을 걸기 위한 갤러리라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걸로도 부족해 창 아래로 팔을 걸어 길게 조명을 설치했다. 그런데 옛날 사진들을 찾아보니 초기에는 조명 없이 자연광만을 사용했다가 나중에 설치한 것 같다. 아무래도 집이기 때문에 밤에는 너무 어두워서 불편했던 모양이다.

 

삼각형 모양의 긴 조명은 천장과 벽, 두 방향으로 빛을 보낸다

 

매일 걷기 강행군 중이라 그런지 경사로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집에 이렇게 경사로를 만들면 자리만 차지할까? 계단을 쉽게 오르내리지 못하는 어린이나 노인들에게는 계단보다 편리하고 좋을 텐데, 무거운 짐을 다른 층으로 옮길 때도 수레를 이용하면 쉽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 TV에서 본 인도 부자처럼 집안에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지도 모르겠다.

 


경사로를 따라 올라간 3층은 원래 서재였다고 한다. 지금은 라로슈의 집 곳곳에 르코르뷔지에의 작품 사진과 스케치, 건축 모형들을 전시하고 있어서 원래 사용하던 모습 그대로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라로슈의 책이 꽂혀있고, 그가 사용하는 물건들이 놓여있어야 진짜 라로슈의 집일 테니까.

 

2층 갤러리에서 올라오면 나오는 서재 공간
집안 곳곳에는 르코르뷔지에의 작품 모형과 그의 스케치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라로슈의 집 스케치도 보였다


갤러리에 놓인 낡은 가죽의자도 눈에 들어온다. 낡았지만 한눈에도 르코르뷔지에 의자다. 그런데 시테 국제캠퍼스의 스위스 학생회관에서 본 것보다 훨씬 낡았다. 너무 낡아 스위스 학생회관에서와는 달리 망가질까 봐 함부로 앉을 수가 없었다. 혹시 정말 라로슈가 쓰던 것일까?

 

르코르뷔지에의 대표적인 의자 LC2 “Grand Confort(위대한 편안함)”


이제 갤러리를 나와 2층의 큰 창 앞으로 난 복도를 걷는다. 마치 다리처럼 집의 이쪽과 저쪽을 연결해 주는 곳이다. 하얀 알루미늄 섀시에 익숙한 탓인지 창틀 프레임이 너무 얇아 깨지거나 너무 춥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긴 90년쯤 전에 지은 집이니 지금 같은 단열은 아니었을 것이다. 큰 창이지만 프레임을 분할해 놓은 것도 어쩌면 모양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기술이 크고 반듯한 유리를 제작하는 데 어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창밖으로는 갤러리의 둥근 외벽과 동네의 다른 건물들이 내다보인다. 1920년대엔 분명 이 동네에서 가장 큰 창이었을 것이다. 큰 창으로 내다보는 파리의 동네 풍경이 예쁘다. 입구 골목길의 나무도 푸른 그림자를 드리운다. 덕분에 이 짧은 복도는 실내이지만, 기분 좋은 산책길이 되었다. 르코르뷔지에는 이렇게 건물에 만든 길을 걸으면서 건축물 내외의 풍경과 건축을 경험하고 감상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라로슈의 집은 작은 개인 주택이지만 갤러리의 경사로나 2층 복도 같은 “건축적 산책로(Architectural Promenade)”를 만들어 건물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2층 바닥은 검은 타일이다. 크기와 모양은 1층과 같지만 색깔은 반대인 것이다. 검은 타일이지만 무겁지 않고 밝은 느낌을 준다. 특히 이 복도의 타일은 창가에 있어서 더 반짝여 보였다.

 


창을 지나면 집의 반대편으로 접어든다. 이곳은 라로슈가 생활하던 개인적인 공간이다. 식당과 주방, 욕실, 침실 등이 2층과 3층에 나뉘어 있다.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2층의 식당은 벽의 살구색과 하얀 커튼, 천장의 알전구 조명이 어우러져 따뜻함이 가득하다. 아마도 1층의 부엌에서 음식을 운반하는 데 사용했을 도르래도 재미있었다. 3층 침실에는 좀 큰 붙박이 가구가 있는데, 1980년대에 살던 아파트에 있었던 벽장이 떠올랐다.

 

한겨울과 한여름의 기온차가 50도 이상인 우리나라는 추위와 더위를 견디기 위한 장비와 옷이 많이 필요하니 그만큼 창고 같은 수납공간이 많아야 하지만 파리는 사정이 다르다. 한여름에 전기담요를 넣어둘 필요도 없고, 그늘에 들어서면 끈적임 없이 시원하니, 에어컨이 없는 집도 많다고 한다. 르코르뷔지에가 현대의 우리나라에 있다면, 어떤 수납 해법을 찾았을지 궁금하다.

 

갤러리 쪽에서 2층의 다리를 건너가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살구빛 방이 원래 식당이었던 곳이다


지금은 방이 다 비어있어서 짐작만 할 뿐이지만 아담하고 간결하다. 라로슈가 독신 남성이었다니 더 많은 가구도 필요 없었을 것 같다. 아마 라로슈가 결혼을 했다면 전혀 다른 모습의 집이 되었을 것이다. 3층은 라로슈가 혼자 생활하는 곳이지만, 용도에 따라 침실, 드레스룸, 욕실을 나누다 보니 작은 공간에 오밀조밀하게 사방으로 문이 나있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새로운 공간이 나타나는 것 같다.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에서 빠트릴 수 없는 테라스와 옥상 정원도 놓쳐선 안된다. 2층 갤러리와 서재 사이에는 작은 테라스가 있고, 개인 공간 쪽의 계단을 따라 쭉 올라가면 옥상정원으로 나갈 수 있다. 비록 옥상정원 안쪽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어떤 모습인지는 충분히 볼 수 있다.

 

옥상정원 중간에서 잔느레의 집과 나뉜다. 정원에 설치한 의자가 두 집의 경계선인 것 같았다

 

구석구석 소소한 것들도 마음을 빼앗는다. 당시엔 모던한 디자인이었겠지만, 지금은 더없이 앤틱한 스위치와 문손잡이, 경첩, 창문의 간유리, 알전구 전등 같은 것들이 자꾸만 시선을 붙든다.

 

품질이나 기능적인 우수함을 떠나서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만든 물건이라는 티가 나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집 구경을 마치고 나오면 들어갈 때 무심코 지나쳤던 아담한 정원이 반긴다. 내부에도 옥상정원이 있었지만 역시 땅에 발붙이는 이곳이 더 좋다. 필로티 아래에 만든 정원은 넓지도 않고 많이 꾸민 것도 아니지만, 기둥과 잔디밭 사이로 작은 오솔길을 내어 놓았다. 그 오솔길을 걸어본다. 자박자박 자잘한 자갈이 밟힌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공간을 즐기며 걷는 라로슈의 집에 잘 어울린다.

 


작은 정원이 보는 위치에 따라 이렇게 다양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네모난 기둥과 둥근 기둥이 함께 서 있는 라로슈의 집 필로티는 굵기가 아주 가느다란 것이 인상적이었다.


라로슈의 집은 큰 규모는 아니지만 층과 층, 개방된 공간과 사적인 공간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끊어진다. 다양한 동선을 선택할 수 있는 집이라 집안을 오르락내리락 몇 바퀴를 돌아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집의 풍경이 바뀐다. 집 구경하기 좋아하는 나는 그저 이 집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감히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에 대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습지만, 건축가가 지은 집은 정말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힘든 건축주가 어설프게 많이 아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나는 그 길에 이미 접어든 것 같다. 미안합니다, 여보.

 



* 르코르뷔지에와 라로슈의 집에 대한 정보는 코르뷔지에 재단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fondationlecorbusier.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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